베빈 보이의 배경 : 전시 영국의 석탄 위기 역사

전시 노동장관 어니스트 베빈


 왜 어니스트 베빈은 20,000명의 18세 청년들을 영국에서 가장 고되고 힘든 산업에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의 끝과 2차 세계대전 발발 사이의 시기, 즉 전간기와 깊게 연관이 있다. 이 시기 석탄산업의 약 4분의 1 정도의 광부들이 완전히 일을 못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직한 상태였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석탄은 전쟁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원이 되었고 광부들은 생산성 증가로 이 수요를 맞출 수 있었다. 전쟁전 군대에 있었던 병사들이나 예비군 혹은  국민 방위군에 소속되어있던 사람들은 모두 징집되었고 이들의 빈자리는 실직자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균형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8달 뒤 프랑스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고 이탈리아는 독일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주요 수출시장이 사라져버렸고 상황이 다시 한 번 변하게 되었다. 거의 100여개의 탄광이 하룻밤새에 문을 닫게 되었고 그 곳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실직 상태가 되었다. 34,000명이 넘는 실직자가 생겼고 남부 웨일즈와 북동부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광부 지도자들과 하원의원들은 이들이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도록 규제 철폐를 요구하면서 정부를 압박했고 결국 베빈은 이에 굴복해 악수를 두게 되었다. 그는 광산업계의 군복무 유보 연령(1)을 18세에서 30세로 올렸고 덕분에 수천명의 광부들이 한창 북적대던 탄약 공장과 건축업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심각한 실수였음이 1941년 초에 드러나게 되었다.

 1939년에는 전국에 773,000명의 광부들이 있었다. 이제 그 숫자는 70만명도 안되었다. 그리고 광산에선 매년 28,000명 정도의 인원을 퇴직, 사망, 부상 등으로 잃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광산업에서 14세의 아이들을 고용하기는 했으나 그 숫자가 너무나 적어 이 인원을 보충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5월이 되자 조선소, 제철소, 발전소 등 전국 어디서나 더 많은 석탄을 요구하게 되었다. 하원은 그 때서야 영국이 석탄 부족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석탄으로 그 위신을 얻었던 바로 그나라 영국이. 1939년에 2억 3천 백만톤이었던 석탄 총 생산량이 1940년에는 7백만톤이나 떨어졌다. 그리고 1941에도 여전히 생산량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칠 내각이 들어선 뒤로 필수 근무령(Essential Work Order)이 전국에 적용되어서 이에 해당되는 산업 종사자들은 마음대로 이직할 수도 없었고 고용인들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광산업만은 여기서 예외였다. 광산 소유자들의 강력한 로비 덕분에 광산업은 여기서 예외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20년간 고난의 시기를 겪어왔고 아직까지도 그러했던 광부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불확실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비록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만 뒤늦게서야 베빈은 필수 근무령을 광업에 적용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광부들은 이 행동에 엄청난 불안감을 보였다. 이 조치는 광부들이 광산주에게 예속됨을 의미할 것이었고, 전간기에 있었던 이들의 불화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광부들은 베빈이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도 제공함에 따라 마지못해 이 조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베빈은 필수 근무령을 적용하는 대신 휴일 보장이라는 혜택을 제공했다. 이는 광부들이 그동안 고용주들에게서 얻어내지 못했던 권리였다. 또한 매 교대조마다 1실링씩을 더 받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 다음 달 베빈은 광부들에게 자신들이 속해있던 광산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 때 광부들은 매주 4파운드의 평균 주급(여기에 2실링 9페니 어치의 석탄)을 받았던 반면 조선소에서는 5파운드 16실링 7펜스, 항공기 공장에서는 6파운드 7실링 5펜스를 받았다. 그것도 훨씬 더 좋은 근무 조건에서. 이런 상황에서 500명도 안되는 사람들만이 이 호소에 응답했음은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베빈은 더 강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6월에 그는 1935년 이후로 광업에 종사했던 모든 전직 광부들에게 복귀를 명령했다. 점점 더 마지못해 광부들이 복귀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군복무중이던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널리스트이자 방송종사자였던 랜스데일 호드슨은 이렇게 적고 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많은 수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들은 군대가 더 좋다고 생각했다. 부사관들은 복귀 대상이 아니었기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무급 하사관"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베빈은 72만명의 인력이 필요하다고 쉴새없이 호소했지만 그 숫자는 여전히 채워지지 못했다. 비록 그 수치는 70만 명이라는 수치 위에서 상대적으로 안정화되었지만 생산량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었다. 생산량은 1940년의 2억 2천 4백만톤에서 1941년에는 2억 6백만톤으로 감소했다. 이런 생산량 하락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젊은 인력이 점점 더 고갈되면서(특히 채탄막장coalface에서) 광부들은 체력적으로 점점 더 소진되었다. 또한 그들은 필수 근무령의 적용으로 인해 자신들의 무단결근이 처벌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분노했던 것은 1941년의 임금 인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받는 보상이 여전히 탄약 공장보다도 낮은 수준이었다는 점이었다.

 무단결근은 날로 수준이 높아졌다. 1942년 1월에는 켄트 지방의 Betteshanger 광산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전시 입법에 따라 모든 파업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따라 노동부는 이 파업을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천 명 이상의 광부들이 1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고 50명은 3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3명의 지방 노조원들이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 지역의 소요 상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다른 광산들도 이에 항의해 작업을 중단했다. 내무부는 노조원들을 석방해야만 했다. 5월까지 벌금을 낸 광부들은 9명뿐이었고 그 나머지는 결국 벌금을 내길 거부했다.

 5,6월에 상당한 규모의 파업이 있었다. 총 16만 명의 광부들이 작업을 거부했다. 이를 우려한 전시 내각은 재빠르게 3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번째로 내각은 연료전력부(Ministry of Fuel and Power)을 창설해 석탄 산출량을 조절하는 한편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광부들과 광산주들의 사이를 화해시켜보고자 했다. 이 부서는 또한 대중들에게 연료의 중요성을 인지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두번째로, 광업 국유화에 동의한다는 듯한 제스쳐로 광산의 이중 통제를 도입했다. 정부의 지방관들이 작업을 통제하긴 하지만 광산주들은 여전히 석탄 채굴에서의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임금 조정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광부들이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상황이 마침내 진정되었다. 광부조합은 그 때까지 매 교대조마다 4실링의 임금인상을 요구해왔고 결국 2실링 6펜스의 임금 인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결과는 최저임금제의 도입이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광산주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해왔었다.(2)

 1942년 후반기 석탄 산출량은 상승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이르러 다시 하락했다. 1942년의 석탄 산출량은 2억 3백만톤이었다. 여전히 인력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베빈은 광부가 아니지만 영국 본토에 근무하는 군복무자 중 광산으로 자리를 옮길 사람들을 찾게 되었다. 1942년 9월 광산이 입대 대상 중 하나로 선택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 해 말까지 1,100명만이 이를 선택했다. 1943년 초 랭카셔와 체셔의 몇몇 광산들이 인력 부족으로 인해 문을 닫아야했다.

 1943년 초에 오래된 불안감이 다시금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무단결근과 파업이 늘어난 것이다. 6월 2일부터 11월 13일 사이에 노사분쟁으로 421건의 작업 중단이 있었다. 파이프의 Valleyfield 광산의 광부들과 하필드 메인의 돈캐스터의 Cortonwood와 Hatfiled Main 광산의 광부들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노팅햄셔에서는 18세의 지상 작업부가 지하 작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투옥되면서 이에 대한 항의로 15,000명의 광부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이는 50,000톤의 석탄 손실로 이어졌다.

 6월에 이르러 노동부는 노동력에 대한 계산 결과에서 암울한 수치를 산출해냈다. 이 계산에서는 질병 등으로 인한 합법적 태만 등을 모두 종합해 태만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고려한 결과 유효 인력은 64만 6천명 뿐이었다. 블랙폴에서 있었던 광부 회담에서 베빈은 이렇게 말했다.

 

 올해 말이 되면 광업을 계속할만한 충분한 인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적들에게서 땅을 빼앗을 때마다 그 땅에서 석탄을 긁어내야할 것이고...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절망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당신들에게 제공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마지막 발언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도 이미 광산지역에서 새로 징집되는 장정들이 광산을 택하도록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광부조합은 장관의 이 발언이 단순히 광산지역에서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질문을 던졌다. 혹은 이 조치는 광산 국유화라는 이슈를 피하기 위한 또다른 조치가 아닌가? 그들이 생각하기에 현재 석탄 산업의 문제점의 해결하는 방법은 광산 국유화뿐이었다. 그리고 광산의 운영을 모두 국가가 소유하는 문제가 전쟁 중에 부상한 것은 이번이 비단 처음도 아니었다.(1941년 6월 아이셔Ayrshire 회담에서도 조합은 이미 국유화 문제를 제기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제기된 국유화 문제는 감정적인 문제와 연관이 되어버렸다. Sunday Pictorial지는 베빈에게 '국유화 없이는 징집도 없다'는 공개 서한을 게재했다. 베빈은 조합의 첫번째 질문에 아주 직설적인 답을 내놓았다. 만약 강제력을 동원해야한다면 그 대상은 모든 지역의 모든 계층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국유화 문제에 있어서는 입을 다물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광부들이 불법적인 파업과 태만으로 인해 벌금형을 선고받고 있었다. 9월에 이르러 랭카셔의 16명의 광부들이 벌금 내기를 거부하다가 잠시 투옥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노팅햄셔의 Broxtowe 지역 노동당 하원의원 세이모어 쿡스는 의회에서 석탄 문제로 열린 3일간의 토론에서 국유화를 지지하면서 그 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채광업계의 상황은 점점 더 커져가는 불만의 소용돌이에 들어가고 있다.'

 처칠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까지는 국유화는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현재 석탄과 관련된 상황을 보건데 지금 우리의 시스템을 잔혹하게 전복시키는 행위를 정당화해줄 근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도입 과정이 지나치게 빠를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을 것 같지만,  이런 전복 과정이 제 아무리 잘 구상되더라도 우리가 얻을 득보다는 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한 반응은 우리의 전시운영에 굉장한 해를 끼치리라 생각되며 그 결과 전쟁은 더 길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광부들이 걱정하는 바에 대해선 편의주의적으로 접근했다.

 

 광산업계에 엄청난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우리 모두 들었습니다. 광부들에겐 조금 부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 광부들의 작업 중단으로 인한 손실은 지난 번 전쟁과 비교하면 큰 문제는 아니며 (....) 우리가 전쟁 5년째에 접어들고 있음을 상기해야합니다. 전시의 사고방식으로 전환한지 5년째이며...  현재 광산업계 상황에서 우리의 국가적인 투쟁을 암울하게 만들만한 요소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자신들과 업계에 무슨 일이 생길지를 걱정하는 광부들의 심정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 번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박하게 대한 덕에 굉장히 암울한 시기를 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겪어야할 고통을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잠을 이룰 수 없을테고 누구나 이런 당혹감과 걱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관론자인 저로서는 평화라는 상황이 전쟁보다 나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하원 토론

 


  이렇게 국유화 문제는 잠시나마 뚜겅을 덮어놓을 수 있었지만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난다해도 결코 해소되지 않을 그런 문제였다. 

 바로 이 토론회에서 연료전력부 장관 길리엄 로이드 조지는 광산 지역에 대한 징집 계획을 다시 한번 암시했지만, 베빈은 몇 주 동안 이 문제를 미뤄두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 더 많은 인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찾아 헤맸다. 지난 2년간 6만 명이 넘는 광부들이 광산으로 돌려보내졌다. 산업계에서 48,890명이 돌아왔고 육군에선 9.600명이, 공군에서도 1,800명이 돌아왔다. 아직 영국에 주둔해있으면서 앞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부대를 대상으로 나이든 복무자들을 마지막으로 그러모아 7,000명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병역 선택자optant-입대시 광산을 채택한 이들-은 3,366명뿐이었으며 군대에서도 3,500명만이 자리를 옮겼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도 베빈은 72만명이라는 목표를 채울 수 없었다.(사실 이 목표는 그 이후로도 결코 달성되지 못했다.) 전시내각은 외국에서 작전 수행중인 부대의 전직 광부들을 불러들이는 방안을 고려해보다가 거절했다. 더 나아가 영국에 이던 독일과 이탈리아 포로들 중에서 수백 명을 뽑아 투입하는 방안도 기각되었다. 포로들을 이용한다는 방안은  다니엘 데이비스와 같은 사람들이 이미 제기했던 바가 있었다. 그는 1943년 9월에 '더 타임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북이탈리아의 광부들은 세계적으로 일류라는 소리를 들으며 독일 광부들도 매우 위험하고 작업하기 어려운 광산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숙식을 제공받고 적절한 감독을 받는 이들은 석탄 생산을 통해 전쟁의 끝을 앞당겨 자신들의 석방도 앞당길 수 있으리라. 한 보수당 하원의원은 유죄판결을 받은 흉악범들로 하여금 감옥이나 광산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당연하게도 광산업계에서는 그닥 긍정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노력의 일환으로 노동부 장관은 징집연령을 눈 앞에 둔 청년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원자를 받아보고자 했다. 그 편지는 수신자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을수도 있으나 내용은 그냥 직업 신청서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지하 채광에 자원하고 싶다면 아래의 빈칸을 채우고 지체 없이 보내주십시요.' 당연하지만 그러고 싶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겨울에 접어들 무렵 베빈은 중등학교와 사립학교 6학년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는 이 길을 선택한 학생들도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장래를 선택할 수 있음을 약속했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은 계속해서 광산업계에 남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광산업계는 기계의 혁신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술자들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방송도 노동부가 보낸 편지만큼이나 효과가 없었다.

 광산업계의 소요는 계속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산출량은 계속해서 줄고 있었다. 제 2전선을 위한 계획이 진행되면서 광산업계의 상황이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고 전쟁에 접어든 뒤 2년 연속으로 가혹한 겨울을 맞게 되면서 국내 연료 소비가 치솟자(그리고 실제로 국내 전선에서는 연료 부족에 대한 경고들이 하나둘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회사들이 석탄이 부족해 잠시나마 생산을 중단했었다.) 베빈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광산으로 보낼 장정들이 징집되기 시작했다. 12월 2일 그는 하원에서 어떤 식으로 선발이 이루어질지를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징집 대상은 1918년 1월 1일 이후 출생자(그말인즉슨 25세까지) 중 신체검사에서 1급 판정(그리고 2급판정 중 '발에만 장애가 있는 경우')을 받은 자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면제되는 건 RAF나 해군 항공대에서 비행 임무를 맡은 경우나 잠수함에서 근무하는 경우 혹은 폭탄 처리를 담당하는 경우뿐이었다. 물론 군대에 엄청나게 기여할 수 있는 굉장한 기술을 지닌 경우도 마찬가지로 면제였다. 이들은 이미 병역 선택부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공평한 선발을 위해 베빈은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안했다.

 

 가장 공정한 방법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추첨제입니다. 추첨은 0부터 9 사이의 숫자 중 하나 이상의 숫자를 고르는 식으로 정해질 것이며 소집영장의 끝자리가 그 숫자인 사람들은 채광업으로 전근될 것입니다.

 

첫 추첨은 12월 14일에 이루어졌다. 18세기 후반에 행정교구에서 민병대를 뽑은 뒤로는 처음 이루어진 추첨제였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추첨은 10명중 한 명을 뽑는 식으로 이루어졌으나 광산에서 인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에는 10명 중 2명이 뽑혔다. (32번의 추첨 중 6번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추첨은 베빈과 로이드 조지 뿐만 아니라 상무상 랩 버틀러와 그 휘하가 참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는 좀 더 그럴싸하게 바뀌곤 했다. 추첨번호는 베빈의 홈부르크 모자에서 여비서가 뽑았는데, 노동부 대변인에 따르면 이 여비서의 이름은 '광산에 보내진 장정들의 어머니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기밀에 부쳐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빈이 이런 의례를 거행했을 수도 있지만, 그 스스로 그렇다고 말한 적도 없으므로 아마도 이건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이외에도 베빈이 다른 공직자들에게 뽑아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나 그 스스로 자기 모자에서 뽑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쩌면 어짜피 추첨이나 다른 방법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으로 자기 마음대로 숫자를 골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43년 말 석탄 산출량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해 산출량은 1억 9천 4백만 톤이었다.


 징병 대상자들이 광산으로 배치되리라는 가능성은 베빈이 블랙풀의 광부들에게 연설했을 때부터 언급되었고, 1943년 10월의 하원석탄 토론에서 사실상 확정되었다. 이렇게 상당히 공개적으로 다뤄진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곧 징병 대상자가 될 장정들은 이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설사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설마 자신이 거기에 뽑히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추첨 때 뽑힌 숫자는 전쟁 기간 내내 공개되지 않았다. 때문에 탄광으로 배치된 장정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영장이 집에 도착하고나서였다. 처음으로 선발된 자들에게 영장이 1943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보내졌다. 실로 원치 않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Tom Hickman, Called Up Sent Down- The Bevin Boys' War, pp.2-7.

 

 

(1)

1938년 전시중 병역 면제 계획Schedule of Reserved Occupation이 작성되면서 몇몇 특정 기술군이 징병에 면제를 받았다. 정부는 1차 대전 때 국민들이 너무나 열정적으로 모병에 동참하는 통에 전시 생산이 위험할 정도로 인력 부족에 시달려야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계획은 500만 명의 다양한 직업군을 대상으로 하는 복잡한 계획이었으며 이 직업군에는 광부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지상 요원이 아닌 지하 광부들만 포함되어있었다. 지상요원들은 전쟁 발발 후 면제 조치를 받았다. 철도와 항만 작업부들, 농부, 의사 및 교사들도 면제를 받았다. 산업공학 종사자들이 가장 면제를 많이 받은 직업군이었다. 면제연령은 산업마다 상이했고 군대가 필요로 하는 인력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정부는 이 연령을 수시로 검토/조정했다.

 

(2)그 때 정해진 최소 주당은 지하 작업반이 4파운드 3실링, 지상 작업이 3파운드 18실링이었다. 전쟁 발발 후 광부들은 평균 2파운드 13실링 9펜스의 주급을 받았고 이는 산업별 평균 임금 순위에서 81위에 해당했다. 전쟁 중 2번째로 이루어진 임금 인상에서 평균 5파운드 2실링 5펜스로 임금이 인상되었고 이는 임금 순위에 있어선 54위에서 33위에 해당하는 임금이었다.

 

 

신문 출처:http://trove.nla.gov.au/ndp/del/article/63147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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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3/02/25 00:04 # 답글

    징집된 인원들을 군대가 아닌 탄광으로 보낸 배경이 이랬군요.
  • 유리멘탈 2013/02/27 12:55 #

    전시에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스스로를 희생한 영국인!이라는 이미지와도 많이 다른 광부들의 모습이었던지라 개인적으로는 재밌었습니다.

    길고 재미없는 내용인데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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