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빈 보이 추첨 방식 역사

베빈 보이의 배경 : 전시 영국의 석탄 위기

 근거없는 각색된 이야기에 따르면 저 모자에서 추첨이 이루어졌다나



 베빈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10명 중 2명이 추첨된 경우가 있긴 했으나 계속해서 10명 중 1명을 뽑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표는 잉글랜드 미들랜드에만 해당되는 자료로서 이 자료에 따르면 항상 10명 중 1,2명을 뽑았던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따로 숫자를 뽑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4년에 있었던 15번의 추첨과 1945년의 1번의 추첨은 10명 중 1명을 뽑았는데, 아마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추첨일 것이다. 1943년 12월, 1944년 1,10,11월에 있었던 추첨은 숫자를 2개 뽑는, 10명 중 2명을 뽑는 추첨으로 이것도 아마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9번의 두자리 숫자를 뽑은 추첨은(1944년 3월, 5월 그리고 1945년 1월) 100명중 1명의 비율로 뽑은 것으로 보인다. 베빈이 전국적으로 이런 추첨 방식을 9번을 실행했다면 그가 목표한 수치를 맞추는 것은 통계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아마 이 추첨들은 지역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식이 이루어진 이유는 아마도 훈련소의 규모에 따라 징집자 수를 조정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해석-아마도 이 방식은 이 정확한지,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추첨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중부지방 외의 다른 지역에서의 채굴 기록은 없는 상태이다. 1947년 석탄 국유화 과정에서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고 1950년대 공문서보관소Public Records Office(오늘날의 국립기록보존관National Archives)가 공간 부족을 이유로 미들랜드 자료만을 남기고 파기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자료는 없다.

 

흰색:1~10중 1개의 숫자를 뽑은 것으로 보이는 추첨=>전국적 추첨으로 추정
초록색: 1~10중 2개의 숫자를 뽑은 추첨=>전국적 추첨으로 추정
분홍색:1~100중 하나의 숫자를 뽑은 추첨=>지방 추첨으로 추정

 

주:1945년 5월 7일에 추첨이 한번 더 있었으나(36이 뽑혔다) 유럽에서의 승전으로 인해 이 추첨은 취소되고 베빈 추첨 계획도 끝나게 되었다.


Tom Hickman, Called Up Send Down-The Bevin Boys' War, pp.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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