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빈 보이와 훈련소 역사

베빈 보이의 배경 : 전시 영국의 석탄 위기

*굵은 글씨 제목/사진과 설명은 제가 임의로 추가한 것입니다.

1944년 켄트 주 켄터버리에서 훈련받는 베빈 보이들

이상

 1944년 1월 초 채광 훈련을 받을 첫 징집 대상자들이 신고를 할 무렵 신문은 이들을 격려하는 내용들로 가득차있었다. 더 타임즈 보도원은 영국의 가장 거대한 석탄지대인 요크셔의 폰테프렉트를 방문했다. 그곳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 광산에는 전직 군인들과 자원자들이 크리스마스 때부터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베빈의 소년들Bevin's boys"라는 명칭은 이미 광산지역에서 쓰이고 있는 표현이며 이 곳에 도착하는 바로 그 베빈의 소년들은 '환대'를 받고 있다. 소년들은 주위를 돌러보면서 이미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단호함을 존경하게 되고 '1급 갱구 욕탕과 훌륭한 구내식당'에 열광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난 신참들은 뜨뜻한 물로 때를 밀고나서 길을 건너 구내 식당에서 갈비와 으깬 감자, 당근을 즐기고 큰 머그잔에 차를 즐겼다. 이 식사는 고작 1실링 1펜스면 즐길 수 있었다. 식사를 함께 즐긴 내가 감히 증언하건데, 아주 훌륭한 식사였다.

 

 징집자들이 지하로 처음 내려가는 일에 대해서 그는 '아주 스릴 넘칠 것이다'라고 적었다.

 1월 17일에 첫 500명의 징집자들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5개의 훈련탄광-요크셔에 두 곳, 맨체스터 근처 랭카셔에 한 곳, 더럼과 넌이턴에 각각 한 곳씩 있었다-으로 나눠져 배치되었다. 이곳저곳에서 큰 기대감에 휩싸여있었다. 노동부 복지부서의 여성 공무원들은 '접수원'라고 적혀있는 붉은 완대를 차고 분주히 움직였다. 넌이턴 훈련탄광에서는 Moviestone News에서 이미 도착한 이들을 모아놓고 탄광부츠와 안전모와 그 이외의 장비(그 이외의 장비들은 모두 훈련이 끝나면 반납해야했다)를 모두 수령한 뒤 얼굴을 검게 칠하고 이미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꾸며놓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보도원들은 신참들에게 어떤 기분인지 질문을 던졌다. 폰테프렉트에서 타임즈 보도원은 '십여명의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 모두 탄광에 오고 싶어하진 않았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 뒤에 그는 '하지만 모두들 자신들이 이미 이곳에 왔으니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자발적으로 덧붙였다'고 적었다.



 그리고 2일 후 '베빈의 소년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현실

 노동부가 추첨 계획을 세우기 위한 시간이 2달밖에 없었다. 이 두 달 동안 노동부는 광부 조합과 어느 탄광에 훈련소를 세울 것인지 (대부분의 훈련소는 채광이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훈련이 채광을 방해하지 않고 따로 진행될 수 있는 곳에 세워졌지만 몇몇 훈련소는 전쟁이 진행되면서 문을 닫은 광산에 세워졌다.) 합의했다. 또한 노동부는 훈련을 이끌 사람들과 어떤 훈련이 어디서 이루어질지, 그리고 훈련이 끝난 뒤 징집자들이 어디로 배치될지를 결정해야했다. 신문 기사에서는 이 모든 게 효율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마냥 써놓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다른 여섯 곳의 훈련소는 예정상 이미 완공되어야했지만 아직도 몇 주는 더 건설을 계속해야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도 훈련소가 한 곳씩 있어야했지만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수백명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징집자들은 다른 징집자들처럼 훈련 계획을 미뤄야만 했다.(1) 훈련을 진행하던 다섯 곳의 훈련소도 상태가 그닥 좋지 못했다. 맨체스터 탄광훈련소의 구내식당에선 아직도 작업 인부들이 망치질을 계속하고 있었고 부엌에는 도구가 텅 빈 상태였다. 훈련병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Manchester corporation의 영국식당British Restaurnat을 이용해야했다.(2)

 봄이 되어서 모든 훈련소가 훈련생들을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준비가 부족해 겨우겨우 훈련을 진행하는 형편이었다. 10월달에 스코틀랜드의 덤펌린 훈련소에 배치되었던 조지 랄스턴은 다른 훈련병들과 함께 훈련 대신 '연석돌을 깔고 길을 파는 일에 엄청난 시간을 써야했'고 따라서 그는 훈련소가 열린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훈련소는 갱구 욕탕pithead bath가 설치되기로 되어있었지만 스탄 페인이 훈련받았던 쉐필드 근처의 훈련소에는 그런 시설이 아직 없었다. 그가 지내던 숙소에는 욕조가 없었지만 그는 '거실문 뒤에서 거시기를 닦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와 다른 동기들은 토요일 아침에 도시로 나가 지자체의 공중 목욕탕을 이용했다. 비록 입장료 및 이용료였던 1실링도 내기 빠듯한 처지였지만 말이다. 더비셔의 체스터필드에 있는 크레스웰 훈련소는 3월달에 갱구 욕탕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쓸 수 없는 처지였다.

 크레스웰 훈련소는 훈련소 중 가장 규모가 거대한 편이었으며 한번에 500명 이상의 훈련생들이 다양한 단계의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바로 이 훈련소의 상황이 너무나 혼잡해 34명의 훈련생들은 연료전력부(훈련소를 운영하는 부서였으므로 이들을 책임져야하는 위치였다)에 수업을 들을 교실도 없고 훈련에 들어간지 1주가 지났지만 헬멧과 부츠도 없다는 항의 편지를 보냈다. 상황이 이렇게 공공연하게 알려지기 시작하자 광산 관리인은 그 지역에서 방을 빌리라는 명령을 받았고 연료전력부는 부츠와 헬멧에 대해서 사과했다. 이 때 약 7,500여 명의 훈련생들이 훈련을 받고 있거나 이미 받고 나간 상황이었고, 헬멧과 부츠 제작사들은 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숙소

 훈련생들은 훈련소의 준비상황보다도 더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디서 지내고 얼마나 돈을 받느냐였다.

 연료전력부는 군대에서 쓰던 캠프를 호스텔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훈련생뿐만 아니라 그 근처 광산에 배치된 베빈 보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호스텔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 열린 호스텔은 단 두 곳 뿐이었다. 이 문제는 원 거주지가 훈련소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닐 수 있는 훈련생들에게 매일 출퇴근을 할 것을 종용함으로서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거주지를 찾아야하는 나머지 인원들 때문에 숙소관리관billeting officer은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북부와 미들랜드의 빽빽한 인구밀집도 덕에 이미 있던 빈 자리도 전시물자생산에 동원된 수천명의 노동자들에 의해 꽉찬 상황이었다. 돈캐스터에는 베빈 보이를 받아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5천 명 중 3백 명만이 수용 의사를 밝힐 뿐이었다. 미들랜드에서 빈 방이 너무나 적어서 숙소관리담당관은 구세군의 힘을 빌려야했다. 소집되기 전까지 소 사료 공장에서 사환으로 일했던 피터 레인보우는 그의 근무지인 넌이턴에서 8마일 떨어진 코벤트리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또 코벤터리 간이 숙박소로 보내졌다. 그 간이 숙박소는 새 병원 옆에 있는 낡은 병원의 임산부 병동이었다. 브라이튼에서 온 레스 윌슨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당연히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피터 레인보우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건물은 아주 음울할 뿐만 아니라 난방도 되지 않았다. 구세군 책임자는 숙박인원 관리에 짜증날정도로 엄격했다. 아침을 6시 반까지 먹으로 나오지 않으면 죽도 주질 않았고 저녁 9시 반에는 무조건 소등했다.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코벤트리에 미군 대대 하나가 왔는데, 내가 지내던 건물 윗층에 40명 정도가 묶게 되었다. 그들이 온 다음 날 우리는 화재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깨게 되었다. 그리고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키놈들이 너무 열악한 숙박시설 때문에 의자 몇개를 태워 불을 피우다가 차마 겉잡을 수 없이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레스 윌슨의 경우는 이렇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지만 결코 바퀴벌레를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곳은 바퀴벌레로 가득차 있었다. 그 지역 전체에 드글드글했다. 불이 켜지면 사방으로 도망갔다. 그 놈들이 정말 싫었다. 결국 우리는 아침을 모아다가 우리 방에서 먹어야했다.

 

 축축했던 침대보다도 더 곤란한 문제도 있었다.

 

 우리 방에서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옴에 걸렸다. 당국에서는 우리에게 아무 의료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단념하지 않고 옆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우리는 발가벗고 몇가지 색의 약품이 담겨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어느 간호사-예쁘진 않고 굉장히 컸다-가 들어와서 우리 등을 문질러주었다. 우리들의 침대는 불태워졌다.(3)

 

봉급

 대부분의 훈련생들은 근무지에 배정되고 나면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품고 단기간의 불편은 감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봉급이 지출을 채우기에는 굉장히 빠듯할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선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18세의 경우 1주에 44실링을 받았다. 숙박비는 보통 25~30실링-맨체스터 지역에선 35실링까지도 올라갔다-에 세탁 서비스는 2실링이 더 필요했다.  1주에 훈련소를 왕복하는데 평균 5실링, 6번의 중식을 구내 식당에서 먹는데 6실링 6펜스가 필요했다. 보험료 1실링 10펜스를 공제하고나면, 총지출은 대략 40실링 3펜스에서 50실링 3펜스 사이였다. 18세를 넘어가면 보수가 점점 올라가 21세에는 정규 광부와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되므로 사정은 조금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훈련생들은 18세였다. 1회 지급되는 정착비용 24실링 6펜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무엇보다 1주차의 봉급은 그 다음주까지 지급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넌이턴 훈련소에서 훈련생들은 훈련 이틀째에 항의시위에 들어갔고 이 시위는 맨체스터와 폰테프랙트 훈련소에까지 퍼졌다. 던캐스터 훈련소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총파업에 들어갔다. 모리 피어스는 과연 자신들이 정부에 징집된 몸으로서 파업을 할 수 있는지 여부에 의문을 던졌던 자신의 연설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그 모임은 광부 복지재단 체육관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정부에선 우리에게 44실링을 주는데 우리 숙박비는 30실링이니 파업밖에 방법이 없어.' 한 녀석이 이렇게 말했지. '같이 이 문제를 해결해볼 준비가 되어 있나들?' 그래서 나는 말했지. '나도 파업에 동참하겠어.' 광산 관리인은 우리들 대표가 사무실로 들어가서 파업 사실을 통보했을 때 길길이 날뛰었지. '네놈들은 그러면 안된다고.' 그의 이 말에 누군가 답했지. '그럼 저 망할 창문 밖을 내다보십쇼.' 그리고 그가 창문 밖을 내다봤을 때 대표단 외의 나머지 녀석들이 모조리 눈밭에 앉아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어.

 

 관리인은 던캐스터로의 행진은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광산 대문을 잠가버렸다.

 징집된 광부들을 제도화하려고 너무 서두르다가 노동부는 근시안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노동부는 광산업계에서 그들 나이의 급료에 대해 사람을 파견해 조사하기는 했지만, 바로 그 나이대의 정규 광부들은 자기 집에서 사는 반면 징집자들은 숙박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렸던 것이다.(4) 특별수당(5) 내지는 봉급 인상을 요구하는 청원서가 4개 훈련소에서 작성되어 베빈의 책상위에 올려지게 되면서 이제 문제점이 너무나 명확해졌다.

 베빈은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하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고 결코 일을 미루는 사람도 아니었다. 청원서 작성 4일 후 훈련생들은 16실링의 봉급 인상을 받았고 지하에서 일을 하게 되면 10실링을 더 받게 되었다. 훈련생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데일리 미러에서 실시한 켐페인으로 인해 자신이 행동으로 나섰다는 인상을 받으리라 염려한 베빈은 스스로 그 상황과 거리를 두었다. 보상 공고는 그가 아니라 국립 석탄산업조사위원회 위원장 포터 경Lord Porter이 발표했다. 1월 초부터 조사위원회는 광부들의 지난 봉급 인상 요구가 단기간내에 수용되어야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1월 23일 그런 내용을 출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출판물의 주된 제안은 광부들이 전시 3번째의 봉급 인상을 받아야하며 그 수준은 지하 근무의 경우 최소 5파운드는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록 직접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징집자들의 요구를 매우 유효하게 담아낸 문장이 급하게 추가되었다.

 

 17.5세 소년들의 봉급도 성인들처럼 인상되었다. 하지만 조사위원회는 더 나이가 많은 청년들의 사정을 고려할 때 더 큰 변화가 매우 절실하다고 본다. 특히 현재 강제 징병된 젊은이들은 집에서 떨어져서 하숙집에서 지내야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더욱 그렇다.

 

 베빈의 소년들Bevin's boys라는 표현은 훈련 내내 사용되었다. 하지만 훈련생들은 더이상 베빈의 소년들이 아니었다. 위와 같은 소요로 인해 새로운 지위가 만들어졌다. 유명 신문들에서 이제 그들은 베빈 보이Bevin Boys로 불리웠다. boy의 b가 대문자가 되었고 더이상 소유격 s도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잘난척하듯 표시되었던 따옴표도 어느샌가 사라지게 되었다.



주석 


(1) 잉글랜드에는 9개의 훈련소가 있었다. 북부에서 남부로 다음과 같이 있었다.: 노섬벌랜드 주 크램링턴의 램 훈련소, 더럼 주 호든의 호든 훈련소와 애니필드 플레인의 모리슨 훈련소, 요크셔 주의 폰테프랙트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 훈련소와 우드하우스의 벌리 이스트 훈련소와 던캐스터의 애스컨 메인 훈련소. 랭카셔 주의 스윈튼에 뉴타운 훈련소, 더비샤이어 카운티의 크레스웰의 크레스웰 훈련소. 워릭셔 카운티의 넌이턴의 헌치우드 훈련소.

 추가로 노스 스탠포드셔 주에서 탄광업계에 들어오려는 소년들을 위한 훈련소가 1942년에 스토크 온 트랜트의 켐벌 탄광에 설립되었고 정부 훈련체제에 편입되었다. 켄트에선 시즐레 탄광이 그 카운티의 4개 탄광을 위한 훈련을 맡았다.

 스코틀랜드에는 파이프 주의 덤펌린에 있는 머리콕홀 훈련소가 있었다. 웨일즈에는 몬머스셔 주 블랙우드에 오크데일 훈련소가 있었다.

 

(2) 정부의 요청에 따라 지방 당국에 의해 비영리적으로 운영되는 2,000여 개의 영국식당British Restaurant이 세워졌다. 이 식당들은 주로 학교, 교회에 세워졌다. 이 식당은 배급 쿠폰을 쓰지 않고도 저렴한 식사(당근과 설탕당근을 곁들인 갈은 고기가 일반적인 메뉴였고 9실링에 즐길 수 있었다.)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게 목적이었다. 영국 정부는 1주에 한번씩 영국식당을 이용해 배급제 하에서 영양 보충을 권장했다. 영국식당은 매우 기본적인 식당이었지만 인기가 있어서 긴 줄이 서곤 했다.

 

(3) 코벤트리 구세군 건물 사용은 1944년 내내 이어졌다. 3월 31일에 노동당 하원의원 조지 그리피스는 그 곳의 열악한 환경을 하원에 의제로 올렸다. 그는 데일리 워커지를 인용하면서 그 곳에 욕실이 충분하지 않고 식사는 형편 없으며 광부 훈련생들을 포함한 이용자들은 아침도 먹지 못하고 일을 나가야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말에 집에 가려고 자리를 비우면 부랑자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베빈은 그 곳에 현재 12개의 욕조가 있고 현재 5개가 추가되고 있으며, 식사는 훌륭하고 주말에 자리를 비운 이용자들의 침대는 다른 데에 이용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리고 해고된 야간 경비원이 한 번 다른 직원의 침대를 쓸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베빈은 데일리 워커지의 그 기사는 '거짓말 투성이지만 아마도 그것이 전쟁을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일 것'이라고 반박했다.

 

(4) 좀 더 비교하기 적당했던 집단인 공학 견습공들과 비교해보면 징집자들은 정말 박한 대접을 받았다. 18세 공학 훈련생들은 자신들의 훈련소에서 숙소까지 왕복할 교통비를 지급받았고 중식은 공짜로 즐길 수 있었다. 봉급을 받는 대신 비용 공제금 10실링 6펜스와 능률 보너스를 받았고 훈련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지급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가장 큰 지출항목이었던 숙박비가 지급되었다.

 

(5) 특별수당에 대한 요구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들의 집을 떠나 다른 산업에 배정된 수만명의 국민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Tom Hickman, Called Up Sent Down- The Bevin Boys' War, pp.21-25.




베빈 보이 관련 신문기사 스크랩


왼쪽 기사는 1943년 6월 블랙풀에서 광부조합에게 베빈이 언급한 내용(트랙백)을 다루고 있다.

오른쪽 아래 기사도 1943년 6월 기사로 "베빈의 소년들Bevin's boys"라는 표현이 이미 여기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 윗 기사는 1943년 11월 기사로 아래 기사의 "베빈의 소년들"이라는 표현이 베빈 보이로 대체되었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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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붕괴위기 블로그 : 영국 식당 British Restaurant 2013-09-16 00:45:49 #

    ... 일으키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몇몇 공장의 노동자들이 사실상 전세를 내다시피해서 다른 이용자들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훈련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던 베빈보이 계획 초기에도 훈련소 대신 근처의 영국 식당 등에서 훈련병들이 끼니를 떼우곤 했다. 장소에 따라선 영국 식 ... more

덧글

  • 零丁洋 2013/03/03 10:38 # 답글

    노력 동원이군요.
  • 유리멘탈 2013/03/03 23:21 #

    영국의 전시 동원 이야기야 뭐 이래저래 유명하죠=ㅅ=
  • 셔먼 2013/03/03 13:07 # 답글

    1940년대까지만 해도 19세기 수준의 열악한 환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네요.
  • 유리멘탈 2013/03/03 23:21 #

    뭐 다 사람 사는 세상인거 아니겠음까
  • 행인1 2013/03/03 22:04 # 답글

    숙소도 그렇고 임금도 그렇고 뭔가 주먹구구식이군요.
  • 유리멘탈 2013/03/03 23:25 #

    개인적으로는 영국에서 아이들을 도시에서 시골로 피난시킨 이야기가 겹쳐졌습니다. 아직 폭격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급하게 애들 대피시켜서 제대로 된 숙소도 아닌 곳에서 거의 일꾼으로 지내야했고 그러다보니 부모들이 화가 나서 그냥 집으로 데려갔다는 그런 내용이었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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