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에서의 부상/질병/정신건강/사망 역사

매일 수백명의 사람들이 광산에서 이런저런 부상을 입었다. 대부분은 이런 부상 정도로 일을 멈추지 않았지만, 3일 혹은 그 이상을 쉬어야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 결코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럼 석탄지대에서만 해도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해에 131,776명이 다쳤다. 1944년 베빈 보이들이 처음 투입된 해에 그 수치는 173,716명이었다.


부상

 전쟁 전까지는 지하에서 광부가 죽으면 관행적으로 24시간 동안 작업을 그만두었다. 전쟁 중에 이 관행을 계속 이어나간 광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의 손에 아직 남아있을 때 모든 면에서 광산들이 그랬듯이 부상에 대비하는 설비도 잘 갖춰놓은 광산과 원시적인 광산이 극명하게 차이났다. 몇몇 광산들은 법을 거의 지키지조차 않았다. 법에 따르면 모든 감독관deputy들은 응급처치를 배우고 응급처치상자를 소지하고 있어야했다. 카운티 더럼의 한 광산에서는 요구사항을 지키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수송을 담당하는 모든 광부들에게 잘 봉인된 작은 응급처치키트를 나눠주기도 했다. 반면 웨일즈에서 일한 존 위펜은 탄차바퀴에 손가락이 밟혔으나('그리고 피가 마치 레몬에서 즙이 나오는 것마냥 흘러나왔다') 감독관fireman이 오기 전까지는 마냥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그 광산에서 그 감독관만이 응급처치 상자를 가지고 있었기 대문이다.

 설비가 최고였던 광산들은 고무 지혈대, 부목, 들것뿐만 아니라 들것운반차까지도 구비해놓은 의료설비를 갱도의 대피 구덩이에 마련하고 지하 치료실을 설치했다. 더 나아가 지상에는 항상 병원으로 환자를 실어나를 수 있는 차량과 함께 구급요원이 대기하는 앰뷸런스실을 마련하기도 했다. 최악의 광산에서는 응급처치 상자 한두개 외에는 갱저에 의료설비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병원에 실어나른 차량조차 준비해두지 않았다. 스토크의 한 광산에서 어느 베빈 보이는 야간 근무중 다친 광부가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차가 아니라 외바퀴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그 당시 지하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굉장히 적었다. 데렉 애그뉴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의료 키트 하나에 있는 것이라곤 작은 요오드 앰플 3개, 화상 붕대 3개와 여러 크기의 일반 붕대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본 바에 따르면 '이건 평균적인 수준'이었다. 상당수의 경미한 부상들은 지하에서도 잘 치료할 수 있었지만 그 곳의 비위생적인 상태 덕분에 종종 합병증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켄 다 코스타가 그런 경우인데, 그는 풋릴(드리프트 광산의 입구)을 내려가던 도중 뒤에서 갑작스레 제어를 잃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기어헤드 모터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 물건은 그냥 바위에 부딪치면서 철이 막 긁히고 스파크를 만들어냈다. 나는 안전 구덩이로 들어갔지만 내 얼굴에 바위가직격으로 날아왔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갱저까지 걸어갔고 그 곳에서 응급처치를 해주던 녀석이 일단 내 얼굴을 씻겨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놈 손이 기름과 석탄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던지라 나는 폐혈증에 걸려버렸다. 

 다 코스타는 귀가 조치를 받고 런던의 피부병원에서 외래환자로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치료란 것은 자오선으로 피부를 태우는 것('아주 미친 짓이었는데 그 미친 짓을 당해야만 했다. 결국 심한 여드름이 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이었다. 6달 뒤 의사는 광산업에서 소집해제 진단을 내려줬다.

 지하에서 부상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에렉 아그뉴가 무서워했던 점은 만약 부상자가 걸을 수 있다면 종종 몇마일은 되곤 했던 갱저까지 직접 걸어가야했다는 것이다. 애그뉴가 보기에 부상자가 기절이라도 하면 탄차 때문에 더 심한 부상을 입을 것이 너무 분명해보였다. 조프 로슬링은 부상을 입고 2마일을 걸어가야했다. '신통치않은 램프를 들고 탄차들이 지나갈때마다 대피 구덩이에 숨어가면서' 걸어가는 동안 그의 통증과 메스꺼움은 점점 심해졌다. 미들섹스의 햄프턴에서 인쇄공 도제로 일하던 렌 언게인트는 탄차 사이에 껴서 손가락의 뼈와 살이 분리되어버렸다. 그는 그 상태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비틀거리면서 2마일 정도를 혼자서 걸어가야했다. 그렇게 갱저까지 도달해도 고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부상자가 지면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광산의 작업에 좀 여유가 생길때까지 기다려야했다. 부상이 정말 심한 수준이 아니면 석탄을 실어 나르는 것이 언제나 우선순위였다. 그러고 나면 귀가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로슬링은 3주를 치료받아야했고 언게이트는 거의 3달을 치료받았다.

 로이 도바는 당시의 열악한 의료시설에 대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 때는 암울한 시기였지. 사람 목숨이 오늘날처럼 대접받질 못했어. 최소한 국유화 이후에 NCB[National Coal Board]는 좀 더 신경을 써주더군.'

 

질병

 사고는 제쳐두더라도 광산에서의 삶은 건강에 결코 좋지 못했다. 베빈 보이들은 폐를 망치는 규폐증과 진폐증, 안구진탕증(1), 관절을 이상한 자세에서 혹사시켜 생기는 만성염증까지 겪을 정도로 오랫동안 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광부들 사이에서 흔했던 병을 앓는 경우는 꽤 있었다. 예를 들면 광산과 지면의 온도차 혹은 물에서 일하면서 생기는 폐렴과 흉막염이 이에 해당되었다.

 이런저런 신체적 문제로 베빈 보이에서 소집 해제되는 경우가 있었다. 에릭 바솔로뮤는 애크링턴의 리차드 브릿지 광산에서 주말에 쉬다가 일에 복귀하면서 가슴 통증에 대한 의사의 진단서를 함께 가져왔다. 광산에서는 그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군 의료단에서는 그가 11달 동안 지하에서 일하면서 심장상태가 악화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대로 간다면 그는 중년에 죽을 상황이었다. 그가 바로 코미디언 에릭 모캄비였다. 

 몇년동안 석탄을 캔다는 것은 몇몇 광부들에게는 좁은 공간에 드러누워있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많은 광부들을 이런 식으로 관절염을 앓았다. 시드 워커는 탄광부로는 일한 적이 없고 항상 운송쪽에서 일했지만 젊은 사람인데도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야했다. 2년간 일하면서 그의 어깨 관절이 말을 안 듣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너무나 상태가 나빠져서 '나 혼자 옷을 입을 수도 없고 걸으면서 고통을 좀 덜기 위해서 손은 내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닐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6달 동안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받은 끝에 신체등급이 C3로 판정받으면서 그는 소집해제되었다. 그의 베빈 보이 경험은 엄청난 악몽이었다. 그는 9번의 사고를 겪었다. 그리고 그가 부주의하게 뛰어가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뒤로 넘어진 몇 번의 사고 때문에 그의 목뼈에 충격이 있었다.

 제랄드 캐리는 탄차의 클립을 풀기 위해 한쪽으로만 반복해서 몸을 굽히다보니 허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왕립정형외과에서 찍은 X선에는 그의 굽은 척추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롤란드 가랫은 지하에서 갑자기 눈이 잘 안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어두운 사진 음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케이지가 오르내리면서 생기는 기압변화가 귀에 손상을 주면서 시신경에 영향이 생긴 것이었다.

 피터 알렌의 경우는 원인이 하굿집의 벼룩한테 물린 것인지 아니면 석탄 먼지를 너무 들이켜마신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심각한 폐혈증을 2번 걸렸었고 돌팔이 의사는 3번째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위(胃)의 문제도 심각해서, 쉐퍼 쌍둥이 형제중 피터는 궤양으로 소집해제되었고 데니스 폴크너는 지역 의사에게 위염 진단을 받았다. '나는 수영도 하고 체육관에서 뛰노는 아주 건장한 젊은이였는데 아주 심하게 앓았다. 저 광산 아래에선 모든 게 심해졌다. 나는 계속 토하면서 일을 하다가 쉬다가 그랬다. 폰티프리드의 의료 위원회에서는 내가 광산에서 더 일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진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지는 것은 40년이 지난 뒤였다.'(2) 

 토니 브라운과 레그 테일러는 1947년의 소아마비 창궐(3) 희생되었다. 토니 브라운은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금요일 오후에는 광산에 있었는데 그 다음주 월요일에는 롯지 무어 격리 병원에 갇혀있게 되었다.' 그는 6달이 지나고나서야 간판장이로 일에 복귀할 수 있었다. 테일러는 크리스마스 때까지 병원의 위험군에 속해있었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서는 6달이 더 필요했다. 그 때 그는 민간인이 되어있었다. 그는 팔다리 모두가 약해진채로 퇴원했고 브라운은 다리가 약해졌다. '하지만 나는 7-80퍼센트 정도 회복되었고 그 정도면 괜찮은 편이었다. 호스텔에 있던 다른 녀석과 야간당직경비원의 아들은 훨씬 심해서 폐까지 문제가 있었다.'

 

정신건강

 1943년 12월의 하원 토론에서 랭카스터 중령은 징집 광부들이 정신건강 검사를 받아야하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어니스트 베빈은 이를 비실용적이라고 거부했다. 하지만 몇몇 광부들은 실제로 정신적으로 아주 고단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잭 갈랜드는 스스로가 밀실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그는 주말에 뉴쿼이의 동굴에 아버지와 형제와 함께 갔다가 이를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부끄러워서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절대 좋은 게 아니었다. 그 밑에선 너무나 힘들었다.' 다른 이들은 항의해보았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댄 더히그와 존 마샬은 신경쇠약을 겪어야했다. 더히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 문제가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갇혀있는 걸 싫어했지만-아마도 어릴적에 벽장에 갇힌적이 있어서 그러거나 다른 이유가 있었던것 같다-  그게 문제가 될거라고 보지 않았다. 나는 작업장 천장에서 뛰어내려서 감자더미마냥 땅에 부딪쳤다. 내 반대쪽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뛰어올라왔다. 진료실에서는 내게 피가 무섭냐고 질문했는데 나는 아니라고, 블릿츠 중에서도 런던에서 시체를 끌고다녔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노섬버랜드의 알윅에 있는 스톱우드 광산의 '어둡고 갇혀있는 감각'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는 2년 동안 일하다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게 어떻게 된건지 말해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고 집주인 아들과 함께 썼든 침대에서 뻗어있었던 기억만 난다. 집에 돌아가려고 내 옷 배급쿠폰을 팔아버린 기억이 안나는데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료시설에서 나를 4급으로 낮춰서 소집해제된 것도 기억에 없다. 내 어린 시절은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산술능력음 대단했는데 그것도 이젠 없어졌다. 몇 년이 지나고 내 아내가 살아있었을 무렵 나는 종이와 계산기를 들고 스페어룸에 들어가본 적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토론회에 참여했는데 내 차례가 되자 연단에서 말하려고 했던 내용이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졌다. 옥스퍼드 존 래드칼리프 병원의 의사는 시를 읽어보라고 조언을 해줬는데 나는 키플링을 가슴 깊이 공부했지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헤이츠헤드의 스타게이트 광산에 배치된 존 마샬의 경우 '엄청난 무게감이 내 주위에서 느껴졌다. 어둠이 공포를 자아내고 내게 메달렸다' 그는 이 공포를 어찌하지 못했다. 그는 '영원히 또 영원히' 이 어둠속에 남아있게 될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의 광산 경영자에게 밀실공포증에 대해 말하자 '그는 내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광산으로 보내버렸다. 뉴캐슬의 그린사이드 광산에서 그는 점점 더 심해져갔다. 

 나는 호스텔에서 다른 근무조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환경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광산의 소음도 내 머리에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내가 하는 일은 소리가 중요해서 아주 예민한 청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광산의 소움이 나를 죽여놓고 있었다. 내 청각은 폭발음의 영향에 노출되어있었다.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늙은 광부와 일을하러 갔다. 그 꼴보기 싫은 광부가 캔 석탄을 벨트에 삽으로 퍼올리는게 내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삽질했지만 석탄더미는 점차 쌓여갔다. 그리고 그 자식이 나한테 한 말이라고는 '삽질해.'뿐이었다. 결국 나는 더이상 참을수가 없어서 내 삽을 그 자식 면상에다가 던져버렸다. 광산 경영자는 내가 문제아라고 말했지만 나는 절대 문제아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나는 대체 누가 내 숫자를 추첨했는지, 누가 광산에 나를 데려다 놓은 책임이 있는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가 나를 여기다 데려다놨는지 알 권리가 있는데 아무도 내게 말해주질 않습니다.' 나는 1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다. 그 돈을 낼 수가 없어서 다른 녀석들에게서 돈을 빌려야했다.

  나는 신경쇠약을 겪기 일보직전이었던 차에 광산에서 아주 나쁜 경험을 겪었다.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앉을 기회가 있을때마다 잠이 들곤 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내가 내 램프를 꺼버렸다. 아주 믿을 수 없는 짓거리였지만. 그리고 근무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작은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 내가 일어났을 때 내 주위에는 작은 초록색 빛들이 여기저기서 돌아다녔다. 그 정체는 바로 쥐들로,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내 램프를 다시 키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 때 해야했던 것은 누군가 와서 나를 발견해줄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지만 나는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온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갔다. 갑자기 나는 길에 녹이 슬어있다는 걸 깨달았고 잘못된 길로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옛 작업장으로 와버렸던 것이다. 그 곳의 냄새는 녹, 쓰레기 등으로 아주 엄청났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구출대가 마샬을 찾으러 내려왔다. 호스텔에서 간호사는 그를 침대에 눕혀놓았지만 그는 런던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나중에서야 어머니 집의 벨을 울렸다. 어머니는 경찰이 그를 찾으러 왔다갔다고 알려주었다. 그 시절에 대한 그의 기억은 아주 흐릿했다. 

 나는 상태가 아주 심각해서 아주 흐리멍텅했다. 그리고 점차 더 심해져갔다. 나는 그러다가 광산 먼지 때문에 폐혈성 인두염에 걸려서 세인트 바솔로뮤에 있는 스미스필드의 큰 병원에 실려갔다. 거기서 수술을 하고 한달을 지낸 뒤 병원에서는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아뇨 나는 안 돌아갑니다. 하고 싶은 거 뭐든지 다 하라구요.' 결국 그들은 정신과의사에게 진단을 받도록 해주었다. 그 의사는 내게 테스트를 하고 나선 '너는 광산으로 보내면 절대 안되는 상태였어.'라고 말해주었다.


사망
베빈 보이 중 부담을 견뎌내지 못하고 생을 포기한 사람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브라이언 폴케는 전해들은 바가 있다. 

 내가 휴가를 받아 집에 왔을 때 길건너편에서 사는 두 부인의 조카가 미들랜즈의 광산에 돌아가지 않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이 두 부인들은 명망이 높았던지라 딱히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베빈 보이들이 광산에서 일하던 중 죽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처음 죽은 사람은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징집자가 1944년 3월 뉴캐슬의 헤스워스 광산에서 하강하던 케이지에 끼어 죽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죽은 이들도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1947년 8월 루이자 광산에서 폭발사고로 죽은 게리 무어와 에릭 마틴이다. 이 사고는 이외에도 19명의 정규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다른 베빈 보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카운티 더럼의 2명을 포함해 죽은 여럿을 확인할 수 있다. 

 피터 알랜의 증언(선더랜드의 라이호프 광산)

 그 베빈 보이는 한밤중에 수갱 바닥에서 케이지에 탄차를 싣고 있었다. 탄차가 제 자리에 놓이면 종을 울려서 엔진실의 조종원에게 이를 알리고, 그러면 그가 케이지를 지면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그 베빈 보이가 종을 울렸는데 그제서야 탄차를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상에 이를 먼저 알리지도 않고 케이지에 올라가 탄차에 달라붙었고 바로 그 순간 케이지가 끌려올라갔다. 그는 케이지에 반쯤 걸친채로 즉사했다. 


데스 나이프(뉴캐슬의 더원트 광산)

 옆 광산이었던 에덴 광산에서 탄차행렬이 탈선되었는데, 그 때 그 행렬 꼬리에 베빈 보이 하나가 메달려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하면 안되는 짓이었지만 그러거나말거나 우리 모두가 하던 짓이었다. 그는 결국 깔려 죽었다. 그 더럼 친구 이름은 빅터였는지 빅커스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와 구면이었다. 우리는 같은 호스텔에서 지내면서 우정을 쌓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도날드 위틀(맨체스터의 스윈턴 광산)

 나는 훈련이 끝나고 스윈턴 광산에 계속 남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 한 베빈 보이가 훈련 중 사망했다. 갱도의 탄차가 아래쪽에 있던 베빈 보이들을 덮쳤다고 한다. 나는 그 시기에 일기를 꾸준히 쓰고 있었다. 1944년 10월 20일의 내용은 이렇다. '훈련소에서 심각한 사고. 1명이 죽고 4명이 중상' 


레스 토마스(돈캐스터, 요크셔 메인 광산)

 스퀴저squeezer를 다루던 14살 애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일을 빠져서 한 젊은 정규 광부와 베빈 보이가 죽었다. 갱저로 내려가는 굴곡진 경사로에는 스퀴저가 설치되어있었다. 스퀴저는 탄차가 케이지 앞에서 멈추게 하는 마지막 장치였다. 그 꼬맹이는 잠깐 바람을 쐐러 나갔는데 그 때 이 스퀴저를 열어놓은 상태로 나간 것이다. 돌로 가득찬 탄차가 그 굴곡질 경사로에 전복되어 내용물이 그 두 명에게 쏟아져버렸다. 그들은 지상에서 죽었다. 앞으로 스퀴저 담당은 그렇게 어린 애들이 맡지 못하도록 규칙이 바뀌었지만, 그건 너무 늦은 조치였다. 


 신문에서 지나가듯이 적어놓은 베빈 보이 사망 소식들을 살펴보자. 피터 알렌이 말한 것과 비슷한 케이지 사고로 반즐리의 웜웰 광산에서 한 명이 죽었다. 케어필리의 마캄 광산에서 천장붕괴로 한 명이 죽었다. 그리고 카녹 케이스 광산과 '한 미들랜즈 광산'에서 갱도 탄차 사고로 죽은 2명을 다 합하면 총합 11명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더 많은 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4)

 존 쿡이 만약 훈련소에서 처음 만나 절친하게 지낸 친구 게리 무어와 함께 루이자 광산에 야간 근무를 하러 들어갔다면 그도 이 사망자 명단에 이름이 끼어있었을수도 있다.   

 나는 원래 게리와 함께 일하기로 되어있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친구 조지 워리너가 소집해제되어 그날 아침 마지막으로 일하고 저녁에 뉴캐슬을 떠나게 되었다.  원래는 한밤중에 케이블을 까는 일을 해야했지만 나는 뉴캐슬 시내에 가서 조지와 맥주를 몇잔 마셨다. 그리고 근무시간에 맞춰서 호스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해서 밤교대조의 고된 일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돌아와서 잠을 청했다.

 





오른쪽에서 3번째가 게리 무어


Dewi Bowen이 그린 광산 구출반


1911년의 광산 케이지


(1)전쟁 중에 남 웨일즈 지바에서만 6,000여명이 규폐증과 진폐증을 겪었다. Bevin Boy에서 데렉 애그뉴는 데일리 미러지의 기사 구절을 인용했다. 그 기사는 혼 호건이 쓴 '먼지 살인'이라는 기사였다.

 '나는 펀데일을 굽어보는 황량한 산에 있는 불행한 론다 밸리에서 11명의 광부들을 만났다. 그들은 순수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꼬여있는 길을 올라가고있었다. 그건 보기에도 애처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수분간 기침을 하고 고통으로 몸을 비비 꼬다가 산의 아주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겨우 회복해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관지염"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너무나 확신에 찬 채로 말을 하는 그 모습은 마치 콩으로 메주를 썼다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는 느낌이었다.

 내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바보가 아니야. 먼지가 문제란걸 알고 있는거지 하지만 저런 식으론...."

 전후 노동당 정부에서 국가보험부 장관으로 있었던 전직 광부 짐 그리프스는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었던 적이 있다. "폐질환으로 죽은 광부의 폐를 꺼내서 바닥에 떨어트려보면 무슨 돌처럼 떨어진다. 그리고 그걸 자르려고 하면 마치 두껍고 질긴 가죽을 자르는 느낌이다."'


 안구진탕증은 한 때 모든 산업재해 중에서 가장 흔한 질병이었지만 그 때는 광부들 사이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1945년 전반기에만 2,252명의 광부들이 안구진탕증 진단을 받았다. 이 질환은 안전 램프의 미약한 빛 아래에서 일하면서 시력이 영향을 받아 생겼다. 주요 증상으로는 눈이 통제가 안되고 양옆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었다. 이 질환에 걸리려면 보통 2-30년이 걸린다.

 

(2)오스트레일리아 연구자 배리 마샬과 로빈 워렌은 후에 헬리코박터 피로리(H. pylori)로 명명되는, 위염과 소화성 궤양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박테리아를 1982년에 발견했다. 당시의 의학적 신조는 박테리아가 뱃속의 산성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이런 발견은 이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샬은 발테리아 용액을 스스로 들이마셔서 앓다가 스스로 항생제를 투여해서 치료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냈다.

 

(3)급성회백수염Polymyelitis, 혹은 1940년대 말 당시에는 소아마비라고 불린 이 질환은 10만명 중 18명 꼴로 걸렸다. 그 중 절반 가량이 완전히 회복했고 20%는 약간의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25%는 불구가 되었다. 5%의 경우는 너무나 치명적이서 사망에 이른 경우였다. 이 바이러스는 1950년대 초에 Salk 백신의 도입으로 사실상 박멸되었다.

 

(4)통계를 통한 유추를 고려하면 이 수치는 굉장히 미심쩍어 보인다. 1942년의 사망률은 천명당 1.14였고 1947년에는 천명당 0.44로 내려간다. 이 중간 수치인 0.79를 4만 8천명의 베빈 보이에게 적용해보면 대략 64명이 죽었다는 결과가 나온다. 0.44라는 수치를 적용해보더라도 21명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Tom Hickman, Called Up Sent Down- The Bevin Boys' War, p,111, pp.114-120.


Dewi Bowen의 그림 출처


케이지 사진 출처


덧글

  • 행인1 2013/03/18 08:51 # 답글

    1.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사람 중에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죠. 루즈벨트는 재임 중에 소아마비 연구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쏟았다고 합니다.(막상 성과는 보지 못하고...)

    2. 20세기 중반인데도 탄광의 작업환경은 여전히 위험하군요.
  • 유리멘탈 2013/03/18 21:35 #

    1.그 분은 참 그런 몸으로 그 오랜시기 대통령직을 담당했다는게 정말 대단합니다. 오바마도 4년 임기 전후 사진 비교하면 격무로 엄청나게 초췌해졌다는 사진을 본 거 같은데 말이지요 -_-;;;


    2.아마 영국 석탄업계가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던 상황인것도 미흡한 안전조치 같은 것에 한 몫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국유화되면서 광산들이 상향표준화되고 안전을 더 신경썼다고 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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