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빈 보이의 임금과 노조 문제 역사

광산의 근무조와 그 작업

임금 협상

 1944년 초 광부들의 봉급을 인상했던 포터 봉급 합의는 베빈 보이의 임금을 기존의 18세 기준 3파운드 10실링에서 광부들의 기본 임금인 21세에 5파운드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몇몇 지역의 광부 노조는 더 좋은 조건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노팅햄셔의 베빈 보이들은 21세에 5파운드 18실링의 임금을 받았다. 데비셔의 볼소버 광산과 크레스웰의 광산도 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빅터 시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볼소버 광산 회사는 노팅햄셔에 4개의 광산을 가지고 있었고(1) 2개의 서로 다른 노조와 협상하는 건 문제가 생길 ㅅ수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노팅햄셔 노조를 인정함으로서 문제를 간단하게 만들었다.'


성과급?

 대부분의 베빈 보이는 수송/운반(haulage)쪽의 일을 담당했고 지상 요원 임금을 받았지만, 채탄 막장에서 탄광부의 조수 등을 담당했던 이들은 포터 보상안에 따라 정부에서 지급했던 5실링을 제외하면 탄광부collier들이 캐낸 양에 따라 임금을 받았다. 탄광부들은 실상 모두들 도급업자였다. 비단 탄광부들 뿐만 아니라 리퍼, 패커나 새로운 갱도를 설치하는 인원들도 같은 제도의 적용을 받았다. 이들의 급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요소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들면, 탄광부는 경영진과의 합의에 따라 석탄 톤 수에 따라 받을 수도 있었고 캐낸 입방 야드에 따라 받을 수도 있었고 단순히 근무시간에 따라 받을 수도 있었다. 세워진 지주 수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었고 제거한 돌의 양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었고 컨베이너 벨트를 해체/조립한 야드에 따라 받을 수도 있었다. 기계가 고장나서 석탄을 나르지 못하는 경우도 고려될 수 있었다. 같은 일일지라도 그에 따른 보상은 단순히 석탄지대에 따라서만 다른게 아니라 같은 광산에서도 층에 따라서, 더 나아가 같은 층에서도 구역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었다.

 다른 광부들처럼 베빈 보이들도 물에서 일하면 추가 수당('젖은 돈wet money')을 받았지만 이 수당도 다른 수당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에 따라 다른 금액이 협상되었다. 카운티 어럼의 루이지아 광산에서 존 쿡은 주당 7실링 6펜스를 받았다. 요크셔의 핸스워스 너너리 광산에서 조지 포스턴은 6인치 깊이의 물에서 일하면서 일당 3펜스를 벌어 주장 1실링 6펜스를 벌었다. '천장에서도 물이 떨어지는 환경이었던지라 우리는 일당 6펜스의 "옷 수당clothes money"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보충 수당은 한 종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더 싼 쪽을 지급해주기로 했다.'

 탄광부들은 작업을 도와준 인원에게 전통적으로 팁을 줬지만, 베빈 보이도 얻을 수 있는가는 광부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평균적으로 2에서 5실링을 얻을 수 있었는데, 레그 테일러는 프래드 라소프라는 광부가 이 면에서 더 개방적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을 정말 열심히 도와준다고 느끼고 게다가 공휴일이다 하면 그는 정말 선심을 썼다. 15실링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 1파운드를 주기도 했는데 이건 정말 대단히 관대한 금액이었다. 그와 내가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선 5입방 와드의 탄차를 하루에 8개를 꽉 채워야했다. 이는 무게로 치자면 2톤이었다. 그리고 이를 채우는 건 정말 고된 일이었다. 가끔은 돈을 훨씬 더 잘 버는 탄광부들이 있기는 했지만, 프래드를 비롯해 대부분은 1주일에 6파운드 이상을 벌기는 힘들었다.

 

급료수령일 풍경

 조프 다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몇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이 베풀어줬다.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떨어졌던 금액은 광부들이 술을 얼마나 좋아하냐에 달렸던 것 같다.' 바로 그래서 급료수령일에 아내들이 광산에 모습을 비추곤 했던 것이다. 데이브 무디는 많은 아내들이  그랬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급료 주머니를 그냥 뺏어들었다. 안그러면 남정내들은 저 길 아래의 펍에서 흥청망청 썼을테니까.'

 대부분의 탄광부들은 급료를 봉인된 갈색 봉투에 받았다.(조지 랄스턴의 기억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의 레이디 빅토리아 광산은 종이를 아끼자는 차원에서 작은 원통에 급료를 담아서 나눠줬다.) 고정액을 받았던 베빈 보이들은 작업량에 따라 받았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급료사무실에의 창문을 통해 자신들의 봉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 광산은 옛 방식을 고수하기도 했는데, 이런 광산들에선 모든 돈을 광부들이 받아서 광부들이 베빈 보이들의 몫을 나눠주었다. 조프 다비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기 몫을 가지고 있는 광부들을 기다리는 건 별 상관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매주 작업일수가 다를 때도 있었고, 같은 작업일수여도 작업량이 다르곤 했으므로 뭔가 굉장히 노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광부들은 종종 자신들의 몫을 두고 싸웠다. 노르만 비켈은 그 광경을 이렇게 말했다. '급료 사무실 주위에 자기 급여 명세서를 살펴보고 돈을 세보고는 불평을 쏟고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종종 불평으로 끝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조프 로슬링이 그런 일을 겪었다. '이 논쟁이라는게 언어적 폭력을 극단적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진 않았다. 감독은 회사 사람으로서 광부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그러다보면 눈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는 광부협회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데니스 폴크너가 도와줬던 탄광부는 그의 몫을 바로 그 협회에서만 주곤 했다. '일요일 아침에 가지 않으면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협회는 일요일에도 술을 파는 유일한 장소였다. 만약 그가 기분이 좋으면 내게 사이다를 사주기도 했다.'

 조수가 아니라 탄광부로 일했던 베빈보이들은 괜찮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알란 그레고리는 심지어 한 주에 11파운드 11실링을 번 적도 있다. 이 시기 민간분야에서 평균 주급이 4파운드 10실링 정도였다. 리퍼와 갱도 운전부들-이들은 탄광부도다도 돈 을 더 잘 벌어서 한 주에 20파운드를 벌기도 했다-을 도왔던 베빈 보이들도 돈을 잘 받는 편이었다. 짐 리반스가 도왔던 리퍼는 그의 도움을 높게 쳐줘서 수입을 6:4로 나눠주기까지 했다.


공제액

 공제액은 대부분의 베빈 보이들에게 불만의 대상이었다. 특히 최소임금 수준으로 겨우겨우 생활을 꾸려가는 베빈 보이들에게 그러했다. 데렉 애그뉴는 켄트 주의 시즐렛 광산에서 운송쪽에서 일하고 번 돈이 어떻게 공제되는지를 나열해주었다. 일단 그는 질병 및 사고에 대비해 지불하는 의사(6펜스)와 병원(4펜스) 공제액에 동의했고, 비록 자신의 의사를 묻지는 않았지만 적십자사에 돌아가는 2펜스에도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복지비용으로 공제되는 3펜스에 대해서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비용이 레크레이션실 이용비용에 해당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영화관람을 즐기거나 춤을 추려면 항상 돈을 더 내야했다.') 하지만 갱구욕탕 때문에 공제되는 8펜스(비록 이 비용이 거의 대부분 비누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속터지게' 한 공제액은 그가 일했던 무가스naked-flame 광산에서 썼던 카바이드등을 위한 카바이드 비용 6.5펜스였다. '즉 우리는 시즐렛 광산의 석탄을 닦아내기 위한 비용뿐만 아니라 광산에 불을 킬 비용도 내야했던 셈이다.'하고 그는 크게 분개하며 글을 썼다.(2) 세금원천징수와 건강보험까지 다 포함해 애그뉴의 임금에서 14실링 4.5펜스가 공제되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2파운드 11실링 4펜스였다.

 어떤 명목으로 얼마나 임금이 공제되는지는 지역단위로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공제액은 구내식당(6펜스) 다양한 공제기금(2펜스), 노령 광부들을 위한 공제액(2펜스), 광부클럽 혹은 광부협회(1펜스), 만약 장례가 있을 경우 장송곡을 연주하기 위한 광산 악단 비용(1펜스) 등이 있었다. 대부분의 광산들에선 조합이 무게측정담당의 조수에게 돈을 주기 위해 따로 공제항목을 만들어두었다.(역주) 많은 광산에서 광부들은 곡괭이 연삭기 비용을 각자 알아서 부담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이 대신 모두에게서 의무적으로 비용을 걷는 식으로 해결했다. 이런 연삭기가 작업에 별반 필요가 없었던 운반쪽 인원 및 베빈 보이들은 이 공제액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노조 가입문제

 하지만 기묘하게도 애그뉴는 공제액만큼이나 베빈 보이들에게 불만의 대상이 되었던 비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비용은 바로 광부조합과 관련된 비용이었다. 많은 베빈보이들은 광부조합에 조합비를 내기를 거부했다. 이는 단순히 주당 6펜스에서 1실링에 해당하는 돈이 빠져나가서뿐만이 아니라 가입 자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가입을 거부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누구는 신념상 거부했고, 누구는 가입을 강요받는 사실에 분노해서였다. 그리고 상당수는 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자신들을 광업에 종속시켜 더욱더 빠져나오기 힘들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데비셔의 플리즐리 광산에 보내졌던 조프리 먹우드와 그의 동료들은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꾀를 부렸다. 만약 자신들이 조합에 가입하길 거부한다면 광부들도 함께 일하길 거부하고, 대신 군대로 돌려보내지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먹우드는 그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편지로 조합 가입을 권유받았는데 거부했다. 다음 주에 내 임금에서 10펜스가 당연하다는듯이 빠져나갔다. 이에 대해 항의를 해보았지만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그만두기 전까지 돈은 계속해서 자동적으로 빠져나갔다.'

 어니스트 베빈이 1944년 1월초에 하원에서 광부가 노조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한다는 법적인 의무도 없고 강요도 없다고 장담했다. 그의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노조 지부들은 사실상 노조원만을 고용하는 사업장에서 활동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1월말 보수당 하원의원 토마스 갤브레이스는 이 문제에 대해 베빈을 압박하면서 자신이 알기로 남웨일즈에서 조합가입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발언했다.

 베빈은 약점을 찔렸다. 그 때 이미 베빈 보이 계획을 수립하고 첫 대상자들을 훈련시키는 문제로 베빈은 곤란을 겪고 있었다. 만약 갤브레이스의 주장이 사실이믈 이정한다면 사방에서 항의가 쏟아져들어올 것이었다. 만약 베빈 보이들이 조합 가입 거부권을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남웨일즈 광부들이 파업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빈은 정치인으로서 당연하게도 애매모호하게 넘어갔다. 그는 남웨일즈 광부조합과 합의한 사항을 간단하게 인용했다. 그 내용은 광업지대에서 '정상적으로 고용된 모든 노동자들'은 조합원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빈 보이들이 정상적으로 고용되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고, 덕분에 베빈 보이들은 강제적으로 조합에 가입할 필요는 없었다. 1947년이 되서야 노동병역부 장관 조지 이삭(3)이 하원에서 '몇몇 소수의 광산에서' 조합 가입이 고용의 필수요건임을 인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솔직한 답변이 나오게 되었다.

 베빈 보이들은 그 당시 영국에 있던 광산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350여개의 광산에서 일했다.(4) 이 '몇몇 소수'가 정확히 어떤 수치인지는 알 수 없다. 웨일즈 광부조합은 포괄계약(5)으로 운영되었다. 다른 지역들은 이만큼 강경한 정책을 펼치지는 않고 이 문제를 각 지부원들에게 맡겼다. 베빈 보이들에게 가입을 강요하는 지부들도 있었고(빌 힛치는 카운티 더럼의 키블스워스 광산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저 밑으로 내려가면 당구를 치는 집이 있는데, 거기서 조합원 녀석에게 가서 사인하거라."-그건 제안이나 토론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새로 들어온 인원이 자동적으로 가입되지만 원한다면 탈퇴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지부도 있었다. 어느 지부에서는 그냥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카운티 더럼의 터스데일 광산에서 일한 로저 스펜서는 '조합에 속해있던 적도 없었고 권유받은 적도 없었다. 광부들은 우리가 여기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왔을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요크셔의 웰백 광산에서 스탄 페인의 경우도 비슷했다.

 

 조합 가입 강요 같은 건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정부의 지도에 따라 이옥세 왔으므로 조합 가빙문제에 있어서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한다는 것이 조합원들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조합원들이 누리는 혜택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었다. 클럽 설비와 맥주 및 담배 할인 등등. 그것도 아무런 댓가를 치루지 않고서 말이다. 내 생각엔 그 마을에 40-50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놈들 모두 예외없이 조합에 가입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요크셔의 렙튼 엣지 광산에서 일한 조프 다비도 광부들이 앞의 경우와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베빈 보이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300명의 광부들 중에 우리는 52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2명만 조합에 가입했다. 나머지는 자신들을 광업 종사자라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중 몇몇은 광부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중등학교 출신이었던 놈은 광부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조합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가입했다. 내 아버지는 아주 헌신적인 우체국 조합원이셨기 때문이었다.

 

 조합원이 되는 것이 가족 전통이었던 베빈 보이들은 대부분 조합에 가입하길 원했다. 그리고 조합 가입이 옳다고 생각해서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켄트의 스노우다운 과산에서 일한 이안 매킨은 광부 동료 티비가 해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조합이 네 이익을 위해 이래저래 협상을 벌이고 그 혜택을 네가 받는다면 그만한 대가는 지불해지." 이 말은 내게 아주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몇몇 베빈 보이들은 단순히 조합 가입에만 그치지 않고 조합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까지 했다. 데스몬드 에드워즈는 남웨일즈의 타워 광산에서 생산위원회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조프 다비는 조합 지부 위원회에 선출되었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허더스필드의 자신의 집에서 5마일을 걸어서 광산 근처 술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그는 조합에서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보니 나는 글을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 광부들을 위해 편지를 써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나는 온갖 종류의 편지를 다 쓰게 되었다. 정말 온 갖 종류를. 그러다보니 어느새부턴가 나에게 개인적 문제나 어려운 계산을 들고 광부들이 찾아오기까지 했고 해법을 물어보기까지 하게 되었다. 내 생각은 이랬다:나는 아직 18살이고 이 문제에 대해 아는게 사실상 없지. 그렇지만 그런 일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하게 되었다. 광산에서 사고를 겪고 광부 병원에 입원한 조라는 광부를 만나러 버스를 타고 웨이크필드까지 갔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는 결국 나중에 죽었다. 아직 한창인 나이였는데.

 

노조 가입의 혜택

 합리적으로 보자면 조합 가입에는 분명 이득이 있었다.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려 일을 못하더라도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하루 3실링 4펜스, 1주 최대 1파운드의 금액만으로 버텨야했다. 존 쿡은 카운티 더럼의 루이자 광산에서 탄차 사이에 끼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3주간 일을 나가지 못해서 호스텔 비용을 치루기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짐 리반스가 웨일즈에서 스노우다운으로 일터를 옮겼을 때 그는 자신이 조합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후에 손을 심하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절실하게 필요해서 다 낫기도 전에 일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조프 다비는 돌이 가득 찬 탄차가 전복되어서 그의 발이 다쳤을 때 조합원이었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먼저 그는 조합에서 돈을 받았고, 광부보장협회의 의사가 그가 다시 일할 수 있게 됬다고 2번이나 진단을 내렸을 때도 다른 의사가 진단할 수 있도록 조합이 비용을 대주었다. 다비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보장협회 의사는 정말 막돼먹은 놈이었다. 나는 1945년 8월 7일, 그러니까 유럽승전일 다음날에 사고를 당했다. 나는 허더스필드 병원에서 퇴원해서 그 의사를 보기 위해 듀즈버리까지 가야했다. 누가 보더라도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10월 15일에 일에 복귀하라고 진단을 내렸다. 내 일기에 의하면 나는 11월 10일에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12월 27일에 그 의사가 또 복귀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1월 8일에 다른 수술을 위해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스탄 페인과 그의 동료 베빈 보이들은 웰벡 광산에서 첫주차 임금을 받을 때 조합이 도움울 준 사실을 굉장히 기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노동부에서 정한 임금을 받았는데 이는 그 지역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만스필드나 워솝의 영화관을 한 번 가거나 우드바인에서 뭐 좀 사마시기만 하면 사실상 빈털터리가 되는 그런 수준이었다. 급료사환은 우리가 징집됬으니 노동부가 정한 바에 따라 돈을 받아야한다면서 우리의 항의를 귓등으로 들었다.

 여기서 웰벡 지부장 헨리 포스터가 나섰다. 경영진과 10분간의 회담 뒤 문제가 해결되었다. 우리는 다른 광부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게 되었다. 이건 운이 좋은게 아니라 정의가 실현된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 뒤로 급료창 너머에서 친근한 미소 같은 건 기대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조합을 무시하던 베빈 보이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임금과 관련해서는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요크셔에서 자신의 고향 레스터셔의 엘리스톤 광산으로 자리를 옮긴 조지 포스턴은 조합 가입을 강요받았지만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21번째 생일날에 이를 땅을 치면서 후회했다. 광부들과 같은 수준의 정규 급료를 원했건만 급료 사무실에서는 그가 조합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만큼 돈을 받지는 못한다고 거부했던 것이다. '이건 내게 사형선고처럼 느껴졌고 별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합 가입비는 10실링이었고 이는 주당 6펜스를 내는 것으로 지불되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6펜스를 먼저 내고 조합에 내 이름을 올려놓았다.'  조지 랄스턴도 스코틀랜드의 레이디 빅토리아 광산에서 비슷한 일 겪었다. 분노한 그는 광산 경영자와 만남을 가졌지만 경영자는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가 없네. 조합에서 결정된 사항이야'라는 답변만 내놓았다. 랄스턴은 결국 에딘버러의 조합 지도부에 편지를 부쳤다. 놀랍게도 지도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그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지만 그의 상황은 결국 변하지 않았다. 대신 조합에서는 가입비를 면제해줄 뿐이었다. 포스턴처럼 랄스턴도 포기하고 조합에 몸을 맡겼다.


불화

 1947년 조지 이삭은 하원에서 '몇몇 소수'의 광산들을 언급하면서 조합 가입을 강요받은 베빈 보이들이(하지만 그 구체적인 수치는 제시하지 않았다) '조합원 고용조건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광산'으로 일터를 옮겨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를 원했던 이들이 많았을 것 같지는 않다.

 베빈 보이와 조합 사이의 가장 심각한 충돌은 남 요크셔의 불크로프트 메인 광산에서 일어났다. 이 곳의 베빈보이들은 분노하면서 광산에서 걸어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많은 조합지부들처럼 불크로프트 지부도 처음 18달 동안은 조합원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다. 스튜어트 시즐렛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잘 어울려 지냈다.' 하지만 어느 날 지부장은 베빈 보이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벗들에게

 

 제 생각에 지금쯤 여러분은 새로운 일과 삶의 방식에 거의 완전하게 적응하셨을 것 같습니다(그렇게 편한 방식은 아니지요?).

 어쨌든 저는 광산 지하에서 일하는 모든 광부들이 여러분을 제외하면 모두 조합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요크셔 노조에 가입할 때가 되었다고 보고요.

 그러니 이제 광부의 나머지 사람들과 따로 지내지 말고 조합에 가입하시길 권하는 바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우호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위원회를 대표하여

 

 

바로 그 편지

 

 

 아마 위원회에서 언급한 조치는 클럽 사용 특권 박탈과 같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들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무절제한 언어 사용은 베빈보이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졌다. '혁명적' 모임이 곧이어 이어졌고 먼저 베빈 보이들은 일을 거부했다. 그리고 경영진이 조합과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일부는 그 지역의 농가에서 스웨덴 순무 뽑는 일을 ('눈내리고 더럽게 추운 날 눈에 파묻힌채로') 거들어서 돈을 벌렀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갔고, 결국은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시즐렛은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 중 아무도 불크로프트 광산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우리는 결국 다시 모여서 군대에 보내졌다. 나의 경우는 공식 전보가 날아온 덕에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광부로 일했던 시즐렛은 '공병에 딱 맞는 인재'였고 그 뒤 2년 반을 불발탄과 1940년에 해안에 설치한 지뢰를 해체하면서 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도둑을 피하려다가 강도를 만나는 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어쨌든 나한텐 "그토록 원하던 군대"였단 말이지!'

 

 

Tom Hickman, Called Up Sent Down- The Bevin Boys' War, p,111, pp.134-140

 

(1) 이 4개의 광산은 만스필드, 루포드, 클립스톤, 솔제비 광산이었다

(2) Bevin Boy(George Allen&Ulnwin 1947).

(3) 베빈이 외상이 되면서 랍 버틀러는 1945년 5-7월에 노동병역부 2대 장관직을 수행했다. 그 뒤를 이은 조지 이삭은 5년간 그 자리를 맡았다. 이후 1960년 징병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4명의 장관이 노동병역부를 이끌었다.

(4) 영국의 석탄채굴이 정점에 달했을 때인 1차대전에는 2,500개 이상의 광산이 있었다. 2차대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1,900여개 뿐이었고 전쟁이 끝날때쯤에는 250여개가 매장량이 바닥나거나 채산성이 떨어져서 작업을 중단했다.

(5) 재미있게도 정반대도 있었다. 니스의 케픈 코드 광산의 조합지부는 조합지도부가 개입하기 전까지 베빈 보이들의 가입을 거부했다. 

 

 

역주: 무게측정담당자는 광산 소유주들의 편이라는 인식이 광부들 사이에서 강했기 때문에 이들의 조수는 노동조합에서 고용하곤 했습니다. 무게측정담당자를 감시/측정하는 역할.


덧글

  • 행인1 2013/03/24 10:02 # 답글

    뭔과 과거의 관행이나 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듯한 풍경이로군요.
  • 낙숫물 2013/03/25 12:13 # 삭제 답글

    광부보장협회 의사는 정말 ㄱ호로자슥 이네요. 낫지도 않았는데 광산으로 복귀해서 일을 하라니.. 위에서 시키니까 그랬다는건 알겠지만.. 최소한의 양심도 없나.. ;;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