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들의 정치성향-보수당, 처칠과의 악연 역사

대처 여사님하 소식 듣고 묘한 타이밍이다 싶어서 미리 해논 것 중 생각나는 것 하나 투척(...)




 광부들이 정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꺼냈건 아니건간에, 이야기가 한번 벌어졌으면 그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적 성향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그 성향은 양차대전 사이에 그들이 보수당 아래에서 겪어야했던 길고 긴 고난의 산물이었다. 전간기에 광부들은 광산에서 쫓겨나거나 굶주림의 행진을 전개할수밖에 없었고, 쫓겨난 광부들은 극장에 줄을 서야했던 그런 시기였다. 데니스 오웬은 그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광부들이 개보수당Confuckingservative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보수당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조프 베이커의 경우는 거의 언제나 '망할 토리새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냥 친한사이여서 쓰는 표현이긴 했지만.' 웨일즈의 엠파이어 광산에서 일했던 데릭 셀비 같은 경우는 윈스턴 처칠의 선거구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자 그순간부터 '에핑Epping 경으로 불리웠다. 정작 나는 그 때 보수당 지지자도 아니었는데.'(1) 선더랜드의 광부집에서 하숙했던 피터 앨런의 경우는 '내가 처칠의 지지자라는 걸 알자마자 그 집 광부는 나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처칠이 1926년 파업 때 광부들더러 광산에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처칠의 '사자의 포효'가 영국인들을 깨웠다곤하지만, 광부들에게는 그런 영웅이 아니었다. 광부들은 그와 오래된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10년에 웨일즈의 토니팬디에서 광부들이 도급수준과 소유주의 불법노동력 투입에 저항하는 파업을 펼쳤을 때, 처칠이 내무장관으로서 군대를 보내 경찰의 광부들의 파업 진압을 도왔던 역사가 있는 웨일즈에서 그런 감정이 더욱 컸다. 그리고 그들은 16년뒤에 총파업을 강경하게 짓밟았던 처칠도 잊지 않고 있었다. 레스 윌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웨일스에서 처칠의 이름을 입에 담는건 성난 투우한테 빨간천을 흔드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을 입에 담는건 신성모독에 가까웠다.' 이 두 파업의 중간에 위치한 1921년, 경제 공황으로 석탄 가격과 이윤이 크게 내려갔던 때에 광산주들은 광부들이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하도록 강요했을뿐만 아니라 1926년(징집된 베빈보이들 대부분이 태어난 해)에는 더 긴 근무시간을 강요하기도 했다.

 짐 베이츠는 한 광부가 그에게 말했던 내용을 결코 잊지 못했다. '"지미, 광부란게 뭔 줄 아니? 휴지 같은 거란다. 필요할 땐 꺼내서 손을 씻고 필요없을 땐 그냥 내던져 버리는거지."'

 베빈 보이들은 전간기에 있었던 일들이 광부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차츰 알게 되었다. 그 시기 광부들은 가족을 먹여살려야하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1주에 2~3번만 근무에 투입되었고, 어떤 때는 심지어 광산안에서 일을 시작했는데도 돈 한푼 못받고 돌려보내지기도 했다. 광산주들은 사람들을 다 고용하고는 3일만 일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나머지 3일 동안 일하게 하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들이 일하지 못하는 날은 그저 실직자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노조 활동가들 명단을 가지고 있는 광산에서는 이들을 다른 광산지대로 쫓아내버리기도 했다. 탐욕과 착취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특히 폭발 후 유독가스가 위험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계속시켰다는 이야기나, 광산 폭발에서 광부가 죽었을 때 광산이 아니라 그 피해자에게 책임이 돌아가도록 성냥이 시체 옆에 놓여졌다는 식의, 안전규정을 무시해 광부들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광산주들이 전쟁이 끝나고 이득을 보기 위해서 전쟁 전까지는 채산성이 없었던 혈암층을 채굴하도록 전시에 지시를 내렸다는 식의 의혹도 있었다. 정부의 조사결과 그런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사람들 입에는 끊임없이 그런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베빈 보이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과장되었는지, 그리고 광산주들이 대체 어떤 인간들인지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광산주들이 주거지와 의료 혜택, 학교와 신앙생활을 챙겨주는 식으로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책임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몇몇 베빈 보이들은 가끔씩 광산주들을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전혀 보지도 못한 쪽도 있었지만. 허더스필드의 렙튼 엣지 광산의 경우 광산주였던 조지 엘리엇은 항상 광산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 광산에서 일했던 조프 다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말 엄청나게 기이한 사람이었지만 광부들은 그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그를 보고 어떤 재미를 느꼈다. 내가 그를 제대로 만난 걸로 기억하는 건 딱 한 번인데, 천장이 무너지려하고 있어서 더 많은 목재가 필요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지주가 지하에 많이 내려가있어서 지주에 돈을 더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하루동안 파업에 들어갔고 결국 그가 물러섰다.

 그는 자신이 광산으로 들어갈 때도 케이지가 석탄을 나르는 걸 멈춰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상감독관에게 안전문을 열어두라고 하고는 케이지 천장에 탄채로 탄차운반속도(역주:케이지는 탄차운반속도와 사람운반속도가 달랐다. 탄차 운반속도가 2배정도 빠름)로 광산으로 내려갔다. 종종 그는 지상 펌프실의 밀짚더미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전 6시에 광산에 와서 자신의 지팡이로 광부들을 최대한 빨리 광산으로 내려보내려고 했다. '사람이 타는' 마지막 케이지를 기다리면서 광부들이 담배를 피는 꼴을 눈뜨고는 못본다는 식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종아리를 각별히 조심해야했다!

 

광산주들의 방식이 어떤 식이었든간에, 광산업계는 차마 말할수없는 박탈감을 오랜시간 견뎌야했다. 요크셔의 불크로프트 메인 광산에서 일한 스튜어트 시즐렛의 경우처럼 많은 베빈 보이들이 그런 사실에 충격을 받곤 했다. 그리고 왜 광부들이 너무나 당연한듯이 정부를, 전시연립내각을 그토록 불신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불신하는 대상은 비단 정부뿐만이 아니라 정치인들도 포함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정치인들은 언제나 사장편이었던 것이다. 시즐렛은 이렇게 말했다. '광산업계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실상이 어쩐지는 전혀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점점 더 들을수록 광부들에게 완전히 동조하게 되었다.' 북웨일즈의 레이 광산에서 일했던 레스 윌슨도 광부들의 현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보수당 지지 성향은 내 폐 상태마냥 점점 약해졌다.' 그가 광산을 떠날 때쯤에 그는 완전한 노동당 지지자가 되어서, 보수당을 지지하는 자신의 가족들과 불화를 가지기도 했다. '"네가 집안에서 그런 쓰잘데기없는 공산주의적 이야기를 하는 꼴을 도저히 볼 수가 없구나!'하고 내 어머니가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베빈 보이들은 광부들에게 과거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왜 그리 많은 광부들이 전쟁에 신경을 그닥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마이어 바이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애국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만 전쟁 수행에 기여하고 있었다. 전쟁 수행에 대한 보도/기사는 그들에게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고립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쟁이 끝나고 있다, 아주 대단했다, 이 도시를 점령하고 저 도시를 점령했다 그런 이야기들조차도 말이다. 광부들은 항상 광산에 신문을 가지고 왔지만 표제만 볼 뿐이었다. 유일한 관심사라곤 경마 결과뿐이었다. 그레이하운드는 요즘 어떻지? 파리를 되찾았다는 소식 같은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Tom Hickman, Called Up Sent Down- The Bevin Boys' War, pp.132-134.


1912년 윈스턴 처칠


1925년 Trade Union Unity Magazine지에서 묘사한 광산주들



 

(1) 처칠은 1900년에 올드햄에서 보수당 후보로서 선출되면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 자유당으로 옮겼다가 의석을 잃지만, 던디에서 선출되면서 다른 의석을 얻게 되고 이는 1922년까지 계속 유지했다. 그리고 2년간 하원에 발을 들이지 못하다가 1924년 에핑에서 선출되면서 보수당에 다시 합류했다. 보수당이 패배했던 1945년 선거때 에핑 선거구는 인구수 성장 덕에 우드포드 선거구가 떨어져나왔다. 처칠은 우드포드의 의석을 1963년 선거에서 패배할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1918년의 에핑 선거구


1945년 이후 우드포드가 떨어져나간 에핑 선거구




이미지 출처:위키페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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