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발발 직후 영국 등화관제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역사


1. 1차대전의 경험 이후 전간기까지 이어져온 폭격에 대한 영국의 걱정과 예민한 반응은 매우 잘 알려져있는데,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마자 9월 1일에 등화관제, 아동 피난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ARP(Air Raid Preacautions)가 소집되는 걸로도 이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등화관제의 대상은 일반 가정집/건물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조명과 광고 모두를 포함했습니다. 일반 자동차, 기차, 버스와 전차들의 헤드라이트와 내부 전등도 예외없이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소방차, 경찰차, 구급차 등은 그 특수한 역할 때문에 앞의 대상들처럼 강하게 적용받지는 않았지만 가능한한 지키는게 원칙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등화관제를 독일공군의 폭격 위험 정도에 따라 지역별로 다르게 적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나본데 결국 거부되었다고 합니다.


2. 가정집에선 창문을 커튼, 블라인드나 담요 등등으로 덮어야했는데 이게 당연히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불이 세어나오지 않아야했으니 핀 같은 걸로 고정해야하기도 했고 창문틀이 나무가 아닌 석재일 경우는 이게 더 어려웠으니까) 특히 창문이 많은 집에서 사는 가정에선 가정부와 주부들이 이를 굉장히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등화관제는 이런 노력뿐만 아니라 돈도 드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앞의 창문이 많은 집에서 사는 가정은 그래도 유복한 편이었으니 재정적 부담은 어느정도 견딜 수 있었겠죠. 그런데 가족이 근근히 밥 벌어먹는 집에선 (당연히 집에 창문이야 적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고 재정적인 부담도 심했겠죠. 이 등화관제란게 잘 안 지키면 이웃에게 더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었던지라(저 높은 곳에서 빛을 보고 폭격=>옆으로 살짝 빗나가면?) 정부에서 이런 등화관제에 필요한 물품을 비축하고 보조금을 지급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3. 하지만 그런 '안하면 이웃이 더 위험하다!'라는 인식 덕분에 사람들이 등화관제에 대한 필요성엔 크게 공감했고 정부가 법적으로 단속하는 데에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등화관제 단속은 ARP 파수꾼(warden)이 담당했고 집주인이 등화관제를 지키라는 요구에 불응할 경우 경찰에게 넘겨 벌금을 물릴 수 있었습니다. 1939년 10월, 폭격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던 옥스포드 지역에선 이렇게 40여명이 기소당했다고 합니다. 1940년에는 전국적으로 30여만명이 법정에 서야했다고 합니다.

 등화관제를 지키지 않는 건 이웃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인식 덕분에 신고사례도 있었습니다. 1939년 북런던 햄스패드 지역에서는 경찰들이 성난 군중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그들의 요구사항은 한 83세 노인의 집에 켜져있는 불을 '문을 뚫고 들어가서' 꺼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몸상태 혹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불을 제대로 끄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런 상황과는 아랑곳없이 2파운드의 벌금을 물어야했다고 합니다. 당시 2파운드면 1939년에 받는 주당연금의 4배에 달하는 액수였다고.

 이외에도 조명과 광고를 킨 상점에게 본보기로 50파운드의 벌금을 매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 관청 등에서도 이런 등화관제를 철저하게 지키지 않았는지 The Times지에 몇몇 ARP 파수꾼들이 정부 관청들에게 등화관제를 잘 지켜줄 것을 부탁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인즉슨 정부가 앞장서서 이를 잘 지켜주어야 민간인들이 자신들의 지시를 잘 따라주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4. 차량에서 나오는 불빛들도 등화관제의 대상이었다고 앞에 적었는데, 어둠 속에서 불빛없이 운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보니 헤드라이트를 가리는 방식이 쓰였다고 합니다. 판지를 이용하기도 하고 낡은 양말을 씌우기도 했다고 하는데, 재미있게도 내부 조명뿐만 아니라 계기판의 조명도 끄고 다녀야했다고 합니다.(계기판 조명이 폭격기에게 보였을까요...?) 이 계기판 조명과 함께 엮여서 웃지못할 규제가 하나 있었는데, 1940년 2월부터는 시가지에서 차량들은 20mph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기판 조명도 못 키는데 속도를 정확히 어떻게 확인하나는건지...?
 자동차들은 범퍼와 발판에 하얀 줄을 칠해야했고 이 줄이 더럽혀지거나 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경우도 벌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도로의 연석은 1938년 9월 뮌헨위기 당시에 하얗게 칠해졌습니다. 차량들은 인도를 피하려고 그랬는지 하얀 중앙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다녔는데 덕분에 반대차선의 차량들과 충돌위험이 매우 높았다고. 그래서 해가 진 후에는 운전자가 연석을 따라 운전할 수 있게 차량을 우측통행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나본데 그게 받아들여질리가...

 버스와 전차는 또 다른 문제와 씨름해야했는데 그건 바로 승객들의 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금제에 따라 표의 색이 달랐거든요. 자전거는 예외적으로(안전상의 이유로) 앞뒤로 조명을 달아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에서 매우 높은 사고율을 보였다고 합니다.

5. 원래 등화관제가 처음 실시되었을 때(9월 1일)에는 인도에서 손전등을 쓰는게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9월 13일부터는 박엽지로 이중으로 막아서 얇은 빛만 세어나오게 한다면 사용할 수 있게 그 금지가 완화되었는데, 덕분에 재고가 엄청나게 빠르게 소진되어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불빛없이 길거리를 헤메고 다녀야했습니다.

 길거리에서 서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어떤 것이든 하얀색 물건을 지니고 다닐 것이 추천되었습니다. 옷뿐만 아니라 손수건, 핸드백 등. 교통경찰도 교통정리 와중에 하얀 장갑을 낀채로 했다고. 해가 진 후 길거리에 일방통행을 적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것도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해가 지고 나면 시민들이 퇴근하면서 집을 찾고 자기와 같이 걷던 친구를 찾느라 거리는 혼돈 그 자체였다나.

6. 이렇게 혼란스러운 인도/차도의 상황 덕에 1939년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그 해에만 4,113명이 길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 중 2,657명이 보행자였다고. 글래스고 같은 지역은 사망자수가 3배로 치솟았고 버밍햄은 1939년 12월에 1,155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쟁 내내 3만명 정도가 크고 작은 사고에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1940년 1월 발표된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등화관제 실시 후 전국민의 5분의 1이 크고작은 부상을 겪은 탓에 군대에 있는 것보다 도로가 더 위험하다는(-_-) 무시무시한 통계까지 나왔을 정도라고.

 실제로 Homefront의 첫 사망자는 등화관제 실시 첫날의 단속중에 나왔습니다.  런던의 할리 스트리트에서 어느 건물에서 불이 새어나오는 걸 발견한 한 ARP 파수꾼이 집주인을 불렀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직접 손전등을 입에 물고 건물을 타고 올라가다가 3층에서 추락하면서 죽었다고...-_-

 British Medical Journal에선 독일공군이 비행기도 안 띄우고 아무런 비용도 없이 한달에 600명의 시민들을 죽이고 있다는 굉장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1939년 11월 의회에서 등화관제를 놓고 벌어진 토론에서 윈스턴 처칠은  등화관제가 과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정작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선 불이 빛나고 있다면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에 내무장관은 등화관제는 독일에서 더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반박했는데, 그래도 정부 내에서도 등화관제가 너무 심하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졌는지 등화관제 시간이 1시간 단축되게 됩니다. 일몰 30분 후 시작되어서 일출 30분뒤까지 등화관제가 유지되었다고. 1939년 크리스마스 때엔 상점과 교회 등에선 제한되게나마 조명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폭격이 시작되고나선 그런게 허용됬을리 없지만.

 7. 조명도가 낮은 가로등이 1940년에 도입되면서 어느정도 빛이 길거리에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어두컴컴한게 사실이었습니다. 1939년 10월에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의 조명을 좀 더 밝게 키고다닐 수 있는 덮개가 도입되고, 버스도 인도에서 기다리는 승객들을 비출 수 있을 정도의 빛을 내보내는 덮개가 도입되었습니다. 1940년 1월에는 몇실링으로 구입할 수 있는 ARP제 판지 헤드라이트 덮개가 의무화되게 됩니다.

8. 1940년 2월 서머타임이 도입되는데 평화시와는 달리 가을에 앞당겼던 1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 뒤로 쭉 (1차대전때처럼) 1시간을 앞당기채로 생활했는데 덕분에 등화관제로 인한 불편함이 어느정도는 완화되었다고 합니다.(일몰이 생황에선 그만큼 뒤로 당겨졌으니) 1941년 5월에는 이중서머타임까지 도입되면서 여름에는 밤늦은 시간에도 꽤나 밝아서 어두컴컴한 때에 다니는 차량 수가 더 적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자동차 운행 수의 감소는 휘발유 배급도 한몫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사고는 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9. 이렇게 꽤나 빡세게 적용된 등화관제는 등대와 전시물자를 생산하는 공장, 포로수용소의 감시등, 화물을 선적하는 배 등에는 적용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특히 전시물자 공장들은 재빠르게 등화관제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긴 했지만 24시간 내내 인공조명 아래에서 환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전시 물자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치면 어쩌려고?)

 그리고 아시다시피 개전하고나서 프랑스-독일 국경은 뭐 제대로 싸우지도 않는 가짜전쟁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폭격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영국인들도 '너무 호들갑떨었던거 아냐?'하는 분위기가 차츰 퍼지면서 뭐 결국은 초반의 열기는 식어버리게 되었다나.

 무엇보다도 독일 폭격기들은 어짜피 가정집에서 새어나오는 자그마한 불빛(보이긴 했을까?)보다도 강과 같은 지형지물(템즈강!)과 항법 기술에 의존했으니... 그리고 독일 폭격기들에게 가장 큰 표시를 제공해주는 불빛은 영국인들이 킨 조명이 아니라, 독일 폭격기들이 떨어트린 소이탄으로 인한 화재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입니다.


내용 출처:Juliet Gardiner, Wartime: Britain 1939-1945, pp.53-64.

사진 출처:Home Sweet Homefront

덧글

  • 누군가의친구 2013/04/15 00:11 # 답글

    등화관제가 사람 잡는군요.;;
  • 유리멘탈 2013/04/15 23:54 #

    어린애들 피난시키는 것도 이것못지 않게 엄청나게 복잡하게 시행되서 참 말이 많더군요.ㅎㅎ 그건 등화관제 정도까진 아녀서 사람이 많이 죽고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오늘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모로 너무 일찍 설레발을 친 감이 있지요
  • 1 2013/04/15 01:37 # 삭제 답글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잘 봤습니다.
  • 유리멘탈 2013/04/15 23:54 #

    감사합니다 -ㅅ-
  • 은이 2013/04/15 17:08 # 답글

    잘 봤습니다. 요즘 시대에 등화관제를 하면 야시경이 풀티나게 팔릴거 같군요 =_=;
  • 유리멘탈 2013/04/15 23:55 #

    야시경도 원근감이 없다보니 여러모로 사고엔 여전히 취약할 것 같긴 합니다 ㅋㅋㅋ 게다가 전쟁이 길어지면 목의 통증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많아지지 않을련지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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