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영국의 겨울과 석탄-전력 위기 역사

베빈 보이의 배경 : 전시 영국의 석탄 위기



요즘 전기 때문에 말이 많아서 저는 1947년 초 영국의 겨울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 더 알아보고자 이것저것 정리해봤습니다(...래봐야 거의 위키+책입니다...orz)



배경

 2차대전 이전부터 광부노조 중심으로 강하게 주장되어왔고 2차대전 중에서도 끊임없이 요청되었던 석탄산업 국유화는 결국 1947년 1월에 전국석탄청(National Coal Board; NCB)이 석탄업계를 넘겨받으면서 이루어지 된다. 전시였던 1942년부터 석탄 생산과 연료 분배 등을 총괄했던 연료전력부(Ministry of Fuel and Power)가 전후에도 계속 유지되면서 국유화된 석탄산업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전시의 연립정권이 클레멘트 애틀리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연료전력부 장관을 이매뉴얼 신웰(매니 신웰)이 맡게 된다. 그는 많은 광부들의 염원이었던 석탄산업 국유화를 이끌어낸 덕에 광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나 높은 편이었다. 다만 바로 그 점이 영국의 전력난의 한 요인이 되어버렸을뿐.

이매뉴얼(매니) 신웰, 당시 연료전력부 장관

 석탄산업 국유화로 이전부터 국유화를 강하게 주장해왔던 사람들은(전후의 대다수 영국인들처럼) 미래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바람과는 반대로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전시 수준에서 크게 향상되지 못했다. 게다가 전쟁 이전에는 발전소에 보통 12주치의 석탄을 비축해놓았지만 1946년 말에는 4주치의 석탄만이 비축되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신웰 장관은 전국 광산노동자 조합(National Union of Mineworkers; NUM)의 낙관적인 생산량 예측치를 믿고 1947년 겨울을 문제없이 넘기리라 오판해버렸다. 정작 광산노동자들의 무단 결근률은 전시 수준보다도 높았던지라 예상되었던 생산량 향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탄 비축량이 부족하다는 예측이 점쳐지면서 영국인들 사이에 전열기구 수요가 높아지고 가정 전열기구의 증가는 당연하지만 전기수요의 증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1946년말 전열기구의 수요 급증으로 인해 증가한 전력수요는 그해의 발전량 증가분과 거의 맞먹을 정도;; 신웰장관은 1946년 10월 중순에 석탄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해듣지만 석탄업계와 대적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추위가 심하지 않아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대게 되었다.



1947년 1월 1일, NCB기가 계양되고 있다.


 1942~43년의 겨울은 따뜻했던 편이어서 석탄이 부족한 일은 피할 수 있었고 44~46년의 겨울도 엄청난 폭풍과 매서운 추위를 동반했지만 전력수요를 낮게 유지해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아마 1947년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일까(그런 희망을 가지고 석탄업계와의 대결을 피하고 싶었던 점도 있었겠고)

 하지만 1947년의 겨울의 추위와 폭설은 너무나 심했다.


한파와 폭설
 본격적인 한파는 1월 21일부터 시작되어 2월에 영국은 역대 최고의 추위를 맞이하게 되었다. 2월 20일에는 벨기에 해안이 얼어붙으면서 도버와 벨기에 오스텐드 사이의 영국해협의 선박 운행이 중단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2월(28일) 중 26일 동안 내릴 정도의 폭설로 인해 철로와 주요 도로들이 눈에 뒤덮여버리고 수백개의 마을들이 고립되어버렸다. 동부지역에선 부빙까지 떠오르면서 선박의 운행이 위험해졌다. 

2월 3일 기상도. 영국을 저기압이 덮쳤다.

 추위와 폭설로 인해 전력부족이 현실로 다가왔다.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면서 아직 발전소에 보내지 못한 석탄은 운송이 불가능해졌고 철로에는 7만 5천량의 석탄 운송차가 눈으로 발이 묶여버렸다. 그 양은 대략 30만톤 정도;; 육상 운송이 마비되어버리면서 석탄을 발전소에 나르기 위해 석탄운송선들이 안개와 폭풍 얼음의 위협을 무릎쓰고 투입되었고 철도 노조도 가용한 기관차를 최대한 이용해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을 모두 동원했다. 10만여명의 영국군과 자유폴란드군, 독일군 포로들도 철도 제설작업을 위해 투입되었지만 발전소에 석탄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면서 대다수의 발전소들이 발전을 중단하거나 발전량을 낮춰야만 했다. 해안가 마을과 폴리머스, 켄트 등의 해군기지에서는 잠수함의 디젤엔진이 전기를 공급하기도 했다.(블랙커런트 작전)


단전
 신웰 장관은 공장의 전력공급을 끊고 가정 전력공급은 하루에 19시간으로 제한함으로써 석탄 수요를 어떻게든 낮춰보려했다. TV 방송도 중지되고 라디오 방송은 축소되고 신문의 분량도 전시수준으로만 발간되었다. 특히 식량 사정이 나빠지면서 식량 배급이 오히려 전시수준보다 낮아지기까지 했다. 이런 신웰 장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력의 부족은 막지 못했고(2월 9일에는 48시간의 정전이;) 버킹엄궁과 의원에서도 촛불에 의지해 일해야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국민들의 불만은 고스란히 신웰 장관에게 향하게 되었고 그는 폭탄 테러 위협까지 받게 되면서 경찰관들의 경호를 받는 처지까지 되어버렸다.

참고로 풋볼리그는 무기한 연기되었다.(다시 시작되고나서는 6월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광산과 광부, 베빈 보이
 NCB와 정부에서는 석탄 생산 수준을 어떻게든 끌어올려달라고 광부들에게 요청했다. 그 이전까지는 정부(특히 보수당 정권)와의 관계가 나빴던 광부들이 놀랍게도 이번에는 그런 요청에 선뜻 나섰다. 폭설은 교통만 마비시킨게 아니라 광산의 작업도 마비시킬 정도였지만 광부들은 사정이 허락하는대로, 주중에도 이전보다 낮은 결근률을 보였고 토, 일요일에도 광산에 나와 석탄을 캤다. 이런 광부들의 노력 덕에 그 해 2월 22일에는 1946년보다 300만 톤이나 많은 3천 9백만 톤의 석탄을 캐낼 수 있었다. 
 이런 고군분투에는 베빈 보이들도 참여했는데(베빈 보이들은 종전 후에도 경우에 따라선 3년을 더 광산에서 일함;) 대부분 광산 근처의 호스텔과 하숙집에서 지내던 이들에게 일단 집밖으로 나가 버스를 타는 것부터가 엄청난 싸움이었다. 눈이 너무나 많이 내려서 일하러 나갈때 삽으로 길을 내면서 지나가야했는데 그 길조차 이내 눈에 파묻혀버려서 이전 근무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따로 삽으로 길을 파내야했을 정도.

<백성귀족> 1권 중
전기 위기엔 삽같은걸 끼얹나

  일터에 도착한 베빈 보이들은 겨울의 광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검은 동력 바퀴는 새하얀 풍경과 엄청난 대비를 이루었고 언제나 있었던 석탄가루는 새하얀 눈이 내리면서 모두 씻겨내려갔다. 하지만 베빈 보이들은 일단 광산에 내려간다는 것 자체를 굉장히 기쁘게 여겼다고 기억한다(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몇몇 불운한 이들은 얼어붙은 탄차 바퀴를 용접용 버너로 녹여야만 했으니까.). 요크셔의 몬크턴 광산에서 일했던 노르만 브리켈은 케이지(엘리베이터)로 내려가서, 수갱에서 불어오는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공기를 데우기 위해 밤낮으로 화로를 키는 것이 마치 '불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광산 밑으로 들어가서 갱저에서 일했던 이들은 그나마 따뜻했던 갱도에서 일했던 이들보단 불운한 편이었다. 화로가 제 역할을 한다면 수갱벽에서 녹아내리는 얼음이 마치 엄청난 비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방수포를 둘러썼다해도 아주 처참한 꼴로 작업을 해야만 했다. 화로가 그나마 별로 효과가 없다면 옷을 몇겹이나 껴입었다하더라도 갱저가 지상만큼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게 현실이었다. 광산에 따라서는 케이지 조종사들의 눈썹과 코끝에 고드름이 메달릴 정도였다고 한다.

 갱저는 1947년 겨울에는 특히 위험해졌다. 종종 길이가 몇 피트는 되고 두깨는 몇 인치쯤 되는 거대한 고드름이 수갱벽에서 떨어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케이지에서 탄차를 끌어올리고내리던 베빈 보이들은 귀를 항상 열어놓고 있어야했다. 포츠의 말에 따르면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휭하고 내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재빨리 피해야만했다. 케이지의 윗부분에 만들어진 고드름은 타고 있떤 사람들에게 파편을 떨궈내곤 했다. 더럼에선 케이지를 타고 있던 한 광부가 고드름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갱저에서의 작업은 평소보다 더 어려워졌다. 탄차에 내려앉는 눈과 얼음으로 인해 땅바닥은 위험한데다가 장화는 마찰도 별로 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바퀴의 윤활유조차 다른 모든 것처럼 얼어붙어서 탄차가 꿈쩍도 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갱저의 작업인원들은 최소한 막탄의 열기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일이 끝나고 지면의 추위로 인해 겪어야할 충격을 겪지는 않았다. 갱구욕탕이 없는 광산의 경우는 광부들이 작업복이 땀으로 적셔진 상태에서 버스에 타곤 했는데 이 땀이 얼음이 되어버려서 움직일때마다 부서져내리곤 했다.

 광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베빈 보이들도 1947년 초 위기 당시의 결근률이 매우 낮았다고 한다. 우습게도 하숙집과 호스텔이 너무나 추워서 광산에 가는 게 차라리 더 나은 선택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물론 위에 나온 것처럼 마냥 좋은 선택인것만도 아녔지만.) 호스텔은 경우에 따라서는 철제 천장에 그냥 온수파이프가 존재하는게 유일한 난방이기도 했다. 게다가 단전으로 인해 조리기구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곤 했다. 그런 경우 베빈 보이들은 촛불과 가스전등을 들고 부엌의 조리인원을 직접 돕기도 했다.

 하지만 광산에서 광부와 베빈 보이들이 열심히 일하거나 말거나 일단 석탄을 캐도 발전소까지 제대로 갈 수가 있어야지. 그들의 노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폭설로 인해 수운과 육상 교통이 마비된 상태에서 결국 발전소의 석탄 공급은 매우 부족할수밖에 없었고 그 피해는 산업과 가정에서 받게 되어있었다.
 
대중의 반응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정부는 석탄 수출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석탄 수출은 영국의 경제 재건에 분명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폴란드에서 석탄을 수입해오기로 했다. 정부가 가스와 전기 사용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을 때 산업계에서는 이를 따른반면(그리고 약 4백여만명이 그동안 실업상태가 되었다고;) 가정에서는 그딴거 알게 뭐라는 태도였다. 5년전인 1942년 1월에 정부가 비슷한 요청을 했을 때 가정에서 석탄을 최대한 아낀 것과는 엄청나게 대조되는 상황이었다.(그야 1942년 1월 겨울은 이보다 따뜻했으니까..) 영국인들은 이제 참을만큼 참았다고 느꼈고, 문제를 광부들의 탓으로 돌렸다. 반면에 광업 노동자 지도자들은 크리스마스에 특별 열차가 편성된 탓에 석탄이 제대로 운송되지도 못하고 새로운 광업 장비가 도착하지도 못했다고 되받아쳤다. 또한 전력 위기로 인해 자신들도 전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으며 인력의 부족(이는 전쟁전부터 항상 언급되던 것이었다. 그러니 베빈 보이들이 생기게 된 것이고)의 탓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때까지만 해도 광부들의 상황에 대해 동정적이어서 무단결근과 파업에 대해 관대했던 대중들이 1947년에는 이런 주장을 결코 관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광부들 입장에선 일이 터지고난 뒤에 열심히 일했으니 억울한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


홍수
 3월 5일, 20세기 최악으로 꼽히는 눈폭풍이 들이닥친 뒤 점차 날씨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설로 쌓인 눈이 3월 9일부터 녹아내리면서 남부부터 강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눈과 비는 계속 내리면서 그 규모는 점차 커져갔다. 템즈 강이 범람하면서 런던도 물에 잠기게 되었다. 3월 17일에는 트렌트 강이 범람하면서 노팅햄 일대가 물에 잠겨버렸다. 영국을 휩쓸은 홍수는 1주일간 계속되었고 지역에 따라선 물이 다빠지기까지 10일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영국 전역에서 최소 10만여 채 이상의 건물들이 홍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날짜별 주요 범람 지역

윈저의 물에 잠긴 거리


결과
 1947년 초 겨울은 영국에게 크나큰 피해를 안겨다주었다. 1947년 2월 폭설로 인한 피해만으로도 그 해 영국 산업의 생산량이 10%나 감소했다. 여기에 더해 3월에 있었던 홍수는 대략 2억 5천만에서 3억 7천5백만 파운드의 피해를 더 입혔다.(2007년 기준으로 30~45억 파운드 정도의 수치) 특히 농업이 큰 피해를 입었다. 감자를 비롯한 곡물들이 전해보다 10~20%가량 더 낮은 수확량을 기록했다. 밀 씨앗이 땅에서 휩쓸려가면서 식빵 배급은 1948년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식빵과 마찬가지로 정작 전시에 배급제 품목이 아니었던 감자가 겨울에 입었던 피해(7만여톤 상실)로 인해 배급제 품목이 되어버렸다.
 특히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45년 총선에서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노동당의 승리(393석 대 197석!)는 이 사태에서 보여준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 빛이 바래게 되었고 결국 1950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약진에 일조하게 된다.

 국가재정지출의 15%가 군대에 빠져나가고 새로운 보건의료제도(NHS)와 재건계획에도 지출이 따라오던 시점에서 찾아온 매서운 겨울로 영국 정부는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파운드화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달러화가 준비자산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영국정부는 파운드당 4.03달러에서 2.80달러로 파운드를 평가절하하게 된다. 승전국으로서 유럽도 책임져야했던 영국이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은 미국의 마셜 플랜 추진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럼 신웰 장관님은? 앞서 적어놨듯이 신웰 장관님은 광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기에 애틀리 행정부는 사태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는 대중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광부들의 반발을 우려해 신웰 장관을 경질시키지 못했다. 사태가 끝나고 1947년 10월에 그는 연료장관부 장관에서 육군상으로 자리를 옮겨 1950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1965년에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1986년 5월 8일에 10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는 영국에서 3번째로 오래 산 하원의원이다.


내용 및 사진 출처

Tom Hickman, <Called Up, Sent Down-The Bevin Boy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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